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1938)는 인류의 모든 문화가 놀이(play)에서 태어나 자라났다고 말한다. 이 저작에서 하위징아는 인간을 규정하는 말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로운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공작하는 인간)와 나란히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세운다. 하위징아의 말을 더 들어보면 ‘호모 루덴스’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파베르’를 아우르는 더 높은 개념인 듯하다. ‘놀이하는 인간’에서 ‘사유하는 인간’과 ‘공작하는 인간’이 나왔다. 지혜를 닦는 것도 놀이이고 물건을 만드는 것도 놀이다. 그런 놀이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가 춤과 노래다. 신령한 존재를 향해 노래하고 춤추는 의례에서 종교가 출현했고 예술이 탄생했다. 정치와 전쟁도 놀이에서 나왔다. 문명은 놀이의 변용이다.
하위징아는 이런 놀이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으로 ‘아곤’(agon)을 든다. 그리스어 ‘아곤’은 사람들의 ‘모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그곳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뜻한다. 공공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앞에 두고 벌이는 경쟁이 아곤이다. 아곤이야말로 놀이의 본질이다. 이 아곤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전쟁이 놀이의 한 양상이라는 하위징아의 주장이 이해된다. ‘아곤으로서 놀이’를 보여주는 전형이 1200년 동안 지속된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이다. 현대 올림픽의 기원이 되는 올림피아 제전이야말로 놀이와 경쟁이 하나를 이룬 ‘호모 루덴스’의 전시장이었다.
하위징아는 철학적 논쟁도 아곤의 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초기의 철학적 논쟁은 ‘수수께끼 풀기’ 형식을 띠었다. 고대 인도 아리아인들의 ‘베다’가 그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옛 문헌에는 ‘지구의 끝은 어디인가’ ‘지구의 배꼽은 어디인가’ 같은 우주론적인 수수께끼가 등장한다. 이런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 바로 패배한다. 이기려고만 들다 목숨을 잃는 수도 있다. 자기도 답을 모르는 수수께끼를 냈다가 들통나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이 깨진다.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내놓은 자가 가장 높은 지혜에 이른 자로 인정받는다. 수수께끼 풀기 형식으로 벌어지는 우주론적 논쟁은 목숨을 걸고 궁극의 실재를 찾아가는 사유의 전투였다.
하위징아는 철학적 논쟁의 사례로 ‘밀린다팡하’(미란타왕문경)라는 불교 경전도 거론한다.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어로 쓰인 이 경전은 뒤에 팔리어로 번역됐고 다시 한문으로 번역돼 널리 퍼졌다. 이 경전에 등장하는 밀린다 왕은 알렉산드로스 동방 정복으로 세워진 박트리아의 그리스계 왕 메난드로스다. 이 경전에서 메난드로스는 이름난 불교 고승 나가세나와 문답한다. 문답의 내용은 철학적이지만 그 형식은 수수께끼 시합에 가깝다. 두 사람의 문답에 궁정의 현자들뿐 아니라 500명의 그리스인과 수많은 불교 승려가 청중으로 참여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문답에 앞서 관계를 재조정한다는 사실이다.
메난드로스가 말한다. “존경하는 나가세나, 당신은 나와 대담을 할 생각입니까?” 나가세나가 답한다. “폐하께서 현명한 사람의 자격으로 대화할 생각이라면 응하겠습니다.” 왕이 묻는다. “현명한 사람의 자격으로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가세나가 답한다. “현명한 사람은 궁지에 몰려도 화를 내지 않지만, 왕들은 화를 냅니다.” 왕이 동등한 지위에서 문답하는 데 동의하자, 나가세나는 왕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을 던진다. “폐하, 이 난관을 한번 빠져나가 보소서.” 당황하는 왕과 여유로운 고승 사이 문답을 통해 ‘무아’와 ‘윤회’ 같은 불교의 근본 교리가 풀려나온다. 나가세나와 메난드로스의 문답은 철학적 토론이 놀이이자 아곤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인류의 지혜는 아곤과 함께 자라났다.
하위징아는 이런 철학적 아곤의 중심에 있던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를 지목한다. 하위징아가 보기에 소피스트는 놀라운 지식과 기술로 논적을 쓰러뜨리는 지혜의 검투사였다. 하위징아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데가 있다. 그리스 시민들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소피스트 논전을 보는 것이었다. 보통 두 사람이 질문자와 답변자로 나뉘어 ‘해가 질 때까지’로 시간을 정해놓고 논쟁을 벌였다. 답변자가 애초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대답할 말을 잃고 침묵하거나 욕설을 내뱉고 신경질을 부리면 질문자가 승리했다. 반대로 질문자가 정해진 시한까지 답변자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승리는 답변자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등장한 소피스트들이 고대 그리스의 교육과 문화의 터를 닦았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그러나 그 소피스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의 하위징아와는 아주 다른 평가를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소피스트는 ‘겉으로만 지혜를 추구하는 사이비 지식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피스트의 논쟁술을 철저히 검토하는 곳이 ‘소피스트적 논박’이라는 저작이다. 소피스트들은 참된 논리와 거짓 논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의 무지’를 이용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 그 평판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소피스트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명성과 재화다.
소피스트를 낳은 것은 그리스 민주주의였다. 당시 민회나 법정은 설득과 논박의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재능을 과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출세욕에 불타는 이들은 큰돈을 들여 소피스트 기술을 배웠다. 궤변이든 사기든 이기게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 소피스트들의 태도였다. 플라톤의 저작 ‘국가’에서 “강자의 이익이 정의다”라고 주장하는 트라시마코스가 소피스트의 전형이었다. 그리스 민주주의와 함께 태어난 소피스트는 그 민주주의가 어지러워지는 데 한몫한 지식 장사꾼이었다.
그러면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 논쟁술을 분석하는 책을 썼을까? ‘참된 앎을 찾는 자가 자기 논리를 검토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다. 다른 사람의 오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는 오류도 깨닫지 못한다. 남을 잘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소피스트가 논쟁에서 범하는 잘못을 열거하고 그 잘못을 제거하는 길을 보여준다. 문제는 논의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소피스트의 기만술을 더 잘 쓸 수 있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소피스트적 논박’은 ‘소피스트에 대한 논박’을 뜻하기도 하지만 ‘소피스트식 논박’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오랫동안 소피스트 기술을 가르치는 책으로 알려졌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이 저술을 바탕으로 삼아 ‘논쟁술’이라는 책을 썼다.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간명하게 정리해 ‘상대의 주장을 확대해석하라’, ‘은폐된 순환논증을 사용하라’, ‘거짓 추론으로 억지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권하고, 마지막에는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 책의 일부를 확대하고 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표는 ‘참된 앎을 찾는 방법’을 구하는 것이었지 소피스트의 논박술을 익혀 써먹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저 ‘형이상학’ 첫머리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한다고 썼다. 앎은 인간의 타고난 욕구다. ‘영혼론’에서는 ‘감각을 통해 얻은 앎’과 ‘사유를 통해 얻은 앎’을 비교하기도 한다. “감각이 과도해지면 우리는 감각 능력을 잃어버리지만, 지성은 아무리 큰 것을 사유해도 그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큰 소리는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빛이 너무 강하면 눈이 멀어버린다. 그러나 지성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적으로 더 큰 사유를 한다고 해서 더 작은 사유를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더 크게 알수록 우리는 더 잘 생각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로써 우리가 왜 지성을 훈련해야 하며 더 많이 배워야 하는지 납득시킨다.
그러나 지성의 연마가 모두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소피스트식 궤변을 익혀 진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데 써먹는다면, 그런 배움은 참된 앎을 낳지도 않고 정의를 불러오지도 않는다. 소피스트식 가짜 논리는 옛적 아테네만 휩쓸고 다닌 게 아니다. 이 나라에서도 거짓 논리가 공기처럼 떠돌며 사람들을 감염시킨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의 보도와 논평에서, 사이비 지식인들의 역사 왜곡에서, 정치검찰의 파렴치한 기소장에서 거짓 논리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정의를 잃은 논리는 우리의 앎과 삶을 파괴한다. 윤리학 없는 논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