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 가야 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

“여보, 오~노! 기억하시지요?”

아내는 입회 교도관을 의식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철창 너머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빛처럼 스쳐 갔다.

“오~노! 그게 어디요? 멀리야, 가까이야?”

그의 물음에 아내는 답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요.”

면회를 마치고 옥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휘청거렸다. ‘아! 이제 끝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문을 열고 감방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박정희가 죽었다!”

1979년 10·26,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김재규)는 그날이다. 이튿날 아침 영등포교도소. 세상과 단절된 이곳에 ‘오(Oh)~노(No)!’,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머리에 총을 맞자 아내 재클린 케네디가 지른 비명에 실려, 유신의 종말은 전달됐다.

박종만, 1943년 충남 당진 태생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초대 총무다. 저 긴 이름의 위원회는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132명 언론인들의 집합이다. 해직에 앞서 이들은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만방에 고한다. 자유언론! ‘언론자유’가 필자와 독자가 다 누리는 보편적 자유를 위해 여럿이 가는 길이라면, ‘자유언론’은 필자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될 보다 원초적인 자유, 그러니까 홀로 가는 길이다. 선언에 그치지 않도록, ‘선언’ 앞에 ‘실천’이 들어있다. 실천 선언은 그 자체로 자기 옥쇄(玉碎·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음)였고, 박정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혈기와 의기로 충만했던 이 도전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한 가닥 빛이 되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고난의 한 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저항을 타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저항하는 민중이 된, 세계 언론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자유언론실천선언’, 그날로부터 50년이 흘렀다.

“1967년 내가 동아일보 입사 10기예요. 문영희 9기, 이부영 성유보 11기, 그렇게 9~11기 3년 동안 60여명을 뽑았어요. 이들이 동아투위 주축이 되지요. 내가 4·19 때 고3이었거든요. 이때 들어온 사람들이 20살 전후 4·19를 겪은, 민중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현장을 겪은 사람들이에요. 짧았으나 그해 봄 승리의 기억, 동아투위는 4·19의 세례를 듬뿍 받았어요.”

1971년 대학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시위를 했다. ‘동아야, 너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구나’라면서 ‘벙어리 언론’이라고 조롱했다. 기자들은 창 너머로 내다보았다. 그해 4월 1차 ‘언론자유 수호선언’이 나온다. 이듬해 10월이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유신이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그 엄혹한 와중에 73년에 2차 선언, 3차 선언을 하면서 불씨를 지펴간다.

“마침내 일이 터집니다. 74년 10월23일, 서울농대 학생들이 수원 시내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였어요. 그것을 1단으로 보도했지요. 그때는 황새 다리가 부러진 것은 신문에 나도 시위 학생 다리가 부러진 것은 절대 못 나갈 때요. 송건호 국장이 연행되고 기자들은 철야농성을 하고…”

이튿날 아침 9시15분 18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로 시작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다. 네번째 문장은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하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로 이어진다.

이 말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보조지눌의 ‘정혜결사문’ 첫 문장처럼 읽힌다. 넘어진 땅을 짚고 스스로 일어나야 하니, 투쟁은 먼저 자기와의 투쟁이고, 자유언론은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이다. 자유언론이 언론자유의 뿌리임을 이 선언은 선언하고 있다.

그해 12월 광고 탄압이 시작되고 국민들이 백지 광고로 응전했음은 주지하는 바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신문을 펼쳐 들고 첫번째로 읽는 정치적 개인 칼럼’이라고 영국 ‘가디언’은 논평했다. 이듬해 전격 해고가 시작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또 해고되고, 날마다 해고되던 3월17일 새벽, 술 취한 폭도들에게 농성사원들이 밖으로 쫓겨나던 날, 동아투위가 결성된다. 위원장 권영자, 총무 박종만.

“나는 배냇신자예요. 어려서 성직을 꿈꾸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취직을 했지요. 투쟁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어찌합니까. 줄줄이 연행되고 이부영 구속되고, 성유보 딸려 들어가고, 나라도 총무를 맡아야지, 외길이었어요.”

박종만은 두번 해고, 두번 구속에, 13개월 징역을 살았다. 부인이 새로나백화점 지하에서 부침개와 김밥을 팔았다. 사과를 떼다 파는 장사도 해보고, ‘132가게’에서 참기름 장사도 해보고,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공동 번역하기도 하면서 호구책으로 삼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 인권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인권소식’ 첫 호를 제작하기도 했다.

“1978년 동아투위는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민주화운동 뉴스를 ‘동아투위 소식’에 싣기로 했어요. 역사의 기록을 남긴다는 심정으로, ‘거리의 언론인’에게도 책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천선언 4주년이던 그해 명동 ‘한일관’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갖고 소식지를 배포했지요.”

그 안에는 아무도 보도하지 않은 125건의 민주화운동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른바 ‘민권일지’ 사건. 안종필 홍종민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김종철 정연주 위원이 구속됐다. 많은 이들이 ‘제도권 언론인’으로 한번, ‘거리의 언론인’으로 재차 구속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언론투쟁에서 민주화 투쟁으로 연대 진화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종만은 이듬해 11월, ‘오~노!’ 직후에 출소했다.

왜 1974년인가? 충무로 뉴스타파 1층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만난, 말이 느리고 눈빛이 총총한 박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69년 3선 개헌, 72년 유신을 거치면서 국민의 저항이 거세집니다. 74년에 긴급조치가 쏟아지지요. 1호6항, ‘위반·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마음대로 죽일 수 있도록 해놨어요. 민청학련으로 7명에게 사형, 인혁당으로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됩니다. 이듬해 ‘사법 살인’이 일어나잖아요. 나라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고 처형장이었어요. 죽어 나가는데 산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야지요”

김지하가 시 ‘1974년1월’에서 ‘죽음’이라고 표현했던 그해,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들이 마침내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5·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9·26) 자유언론실천선언(10·24), 그 긴 이름들이 그해 태동했다.

김인국 사제단 50주년 준비위원장은 “버스기사나 열차기관사는 행로가 정해져 있지만 택시기사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새로운 50년을 향해 출발하는 사제단의 심경이 택시기사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종만 위원은 “미래 50년이 택시기사의 심경이라면 과거 50년은 목적지가 뚜렷했어요. 그런데 길이 없었지요.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난민의 심경이라 할까요? 왜 이 길을 걸었느냐, 그것은 부끄러움, 정론지 기자라는 자부심과 그 동전의 뒷면이라 할 부끄러움, 기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고 했다.

‘여보게 …보았는가/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한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바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양성우의 시 ‘겨울공화국’ 부분이다.

그 갈림길에서 동아투위는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나 봄으로 난 길을 갔고, 동아일보는 그 겨울에 남아 역사에 부끄러운 길을 갔다. 132명의 동아투위는 현재 72명이 생존해 있다. 첫발을 내디딘 그 날에 맞춰 매월 17일 모임을 50년째 이어오고 있다.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 오는 10월24일 백발의 청년들이 백의(白衣)를 입고 그 주식회사 앞에서 데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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