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김일성·김정일의 남북협력 파괴… ‘유훈통치’ 버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일성·김정일이 수십 년간 쌓아올린 남북 협력 결과물을 연달아 폭파하며 선대의 통일 유훈을 사실상 폐기하고 나섰다. 유훈 통치로 세습을 정당화해 온 북한 정치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다음 달 미국 대선을 앞두고 ‘판돈’을 키우는 동시에 수해와 잇단 실정에 따른 민심 이반을 막아보려는 계산이 깔렸다. 북한의 든든한 ‘뒷배’가 돼주고 있는 러시아도 김 위원장의 도박에 군불을 넣고 있다.

16일 통일부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후 남북 협력 시설을 순차적으로 폐기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시설(철거),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폭파), 경의선·동해선(폭파)이 각각 시차를 두고 폭파됐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남북 관계를 개선해도 경제적으로 얻을 이익이 없다고 판단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과 별개의 국가로 미국과 대화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고, 미국의 리더십 교체에 앞서 직접 ‘판돈’ 키우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대내 결속을 도모하기 위한 용도로도 적대적 두 국가론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북한은 장마당 세대(1980~1990년대 태어난 젊은 세대)가 등장하면서 체제 안정성을 위협받고 있다. 김 위원장이 외부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호법, 청년교양보장법 등 이른바 ‘3대 악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김 위원장은 내부 결속을 위해 적대적 두 국가론과 함께 피포위 의식(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느끼는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남한의 무인기가 평양 상공을 침투했다’고 밝힌 지난 11일 이후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을 고취하는 데 온 힘을 쏟은 게 대표적이다.

지난 6월 러시아와 맺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은 김 위원장에겐 새로운 동아줄이 됐다. 이 조약은 “무력 공격을 받아 전쟁하는 경우 다른 국가는 모든 수단을 통해 군사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는 ‘평양 무인기 침투 사태’에 대해서도 지난 14일(현지시간) “서울의 이러한 행동은 북한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독립 국가의 합법적인 국가·정치 체계를 파괴하고 자주적으로 발전할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내정간섭”이라고 노골적으로 북한 편을 들었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추가 군사 도발을 위한 여러 선택지를 놓고 시기를 조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군사분계선(MDL),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의 국지 도발과 지금까지 27차례 보내온 쓰레기 풍선을 무기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비례성 원칙에 따라 서울에 무인기를 보내 갚아줄 가능성도 있다. 7차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은 선택지에 올려놓되,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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