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은 우리 안을 깊게 파고든다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항 대립의 양끝은 보수 대 진보도 아니고, 우파 대 좌파도 아니다. 그 맞섬은 상식 대 비상식, 시대정신 대 구닥다리의 갈등이다.

노벨문학상이나 노벨평화상은 그리 첨단적 사상이나 급진적 사유를 전개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지구촌 사람들에게 공감의 울림을 주는 이에게 수여한다.

한강이나 노벨상을 억지로 겨냥하여 공격하는 작가나 필자들을 보면 참 가련하고 측은하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짓과 억지 논리가 알몸 보이듯 낱낱이 드러나니 말이다. 그 발화는 자신이 지닌 천박함과 어색함을 고백하는 양심선언이 되어 버렸다.

비상식은 이제 별로 설 자리가 없다. 폭력이나 억지고집의 방식이 아니고는. 원래 소멸하는 것들은 발악하듯 욕하고 비명 소리를 내는 법이다.

-‘몽고반점’은 한강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기묘한 얼룩을 지닌 소설이다. 독자는 그 원초적 이미지에 물들고 그 짜릿한 미학에 멍든다. ‘몽고반점’은 1부 ‘채식주의자’에 이어지는 중편으로서 3부 ‘나무 불꽃’과 함께 ‘채식주의자’라는 장편 소설집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채식주의자’가 폭력이 만들어내는 핏빛 착란을 그리고 있다면 ‘몽고반점’은 성애의 꽃밭에서 피어나는 심미적 경험의 탈주를 펼쳐내고 있다.

영혜의 형부 J는 비디오 아티스트다. 그는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2년째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창작 열의는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는 처제의 몽고반점을 상상하며 처제의 온몸에 꽃그림을 그려 비디오에 담고자 하는 발상을 한다.

“그의 스케치북 속의 여자는 얼굴이 잘려져 있을 뿐 처제였다. 아니 처제여야 했다.” 74쪽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 …그녀의 한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산했다.” 87쪽

영혜는 작품 모델이 되어달라는 형부의 제안에 가타부타 대답도 하지 않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J는 ‘몸에 꽃을 그린다’는 말에 그녀의 눈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챈다. J는 친구의 작업실에서 처제의 알몸에 꽃그림을 그린다. 목덜미로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가지들과 반쯤 열린 듯한 꽃봉오리들로 가득 채운다. 젖가슴 가운데는 황금빛 꽃송이를 찬란하게 그린다. 특히 그는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기고, 흐린 연둣빛을 큰 붓으로 깔아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이 도드라지게 그린다.

영혜의 피부라는 살아있는 캔버스에 물감의 순도 높은 욕망과 J의 붓질이 정교한 미학적 애무가 되어 흐른다. 완성된 꽃그림의 몸은 찬란한 생기를 지닌 식물로 소생한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려왔던 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J는 검푸른 새벽빛 속에서 그녀의 엉덩이 위 몽고반점을 오래 핥는다. “이걸 내 혀로 옮겨 왔으면 좋겠어.” 그의 혀는 질척거리는 농도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몽고반점, 바로 여기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고.

J는 왜 몽고반점이라는 오브제에 탐닉할까? 몽고반점이라는 은유(metaphor)는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알다시피 몽고반점(Mongolian spot)은 신생아의 피부에 나타나는 푸르스름한 반점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 소설 서사에서는 그 반점이 지니는 혈통적 문화적 요소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몽고반점’에서 유아성 즉 어린 아이의 차원이나 원시성 같은 이미지가 울음소리처럼 들려온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01쪽

독자의 읽기 경험은 제각각이고 해석은 자유다. 하지만 이 소설을 포르노와 예술, 금기와 터부, 도덕과 비도덕, 예술과 성애라는 해묵은 도식으로 해석하면 소설 서사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울림을 듣지 못할 것이다. 몽고반점은 꽃을 원하고 꽃이 되기를 기다린다. 아이가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듯이, 몸을 어루만지며 서로의 삶에 꽃을 피우는 관계를 갈망하는 걸까? 이 소설에서 꽃은 타자에 의해 피어난다.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열려지고 사랑에 의해 만개한다. 심장에 그려진 꽃은 타자적 주이상스를, 남근을 감싸고 있는 꽃은 팔루스적 주이상스를 암시하기도 한다.

소설 ‘몽고반점’은 매우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그 도발적인 이미지와 전율의 감각이 영혜의 담담한 언어와 대조를 일으키며 그 강도는 최대화된다. 아울러 이 소설은 매우 분열적이다. 미학 혹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분열성은 기존 질서에의 부적응, 다수성으로부터의 도주, 기존의 상식과 문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변형과 변주를 의미한다. 그렇게 본다면 영혜의 행동과 말은 인간 본래의 백치 상태로의 회귀를 담아낸다고도 볼 수도 있다. 몽고반점과 꽃이 만나고, 몽고반점이 꽃 그림자가 되고, 우리 신체가 만발한 꽃나무가 되는 삶을 꿈꾼다는 듯이.

얼핏 보면 영혜는 거세된 식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고, 몽고반점을 지닌 영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이 정상이라고 말한다. 문명과 가부장제 질서 안에서 잃어버린 몽고반점을 되찾는 일, 마치 거기에 낙원이 있다는 듯이.

‘마치 정상적인 여자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정상적인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미친 건 내 쪽이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재미있다’고 반응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재미는 쓴 맛일 것이다. 제목과 달리 이 소설은 채식을 예찬하는 소설이 아니다. 육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니 살육문화에 저항하며 희생되는 한 연약한 초식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 남편의 1인칭 화자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처형 집의 아파트 입주 집들이로 모인 가족 모임에서 영혜는 육식을 강요당한다. 영혜는 그간 좋아했던 굴무침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 사정을 알던 장인이 호통을 친다. 처형은 야무지게 영혜를 나무란다. 장모는 온갖 육요리를 딸 앞으로 펼쳐놓으며 먹으라고 채근하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영혜 입 가까이 내민다. 그러자 영혜는 몸을 뒤로 젖히며 거부한다. 그 순간 장인은 딸의 뺨을 후려갈기고 사위와 아들로 하여금 영혜 팔을 붙잡게 하고는 탕수육을 영혜의 입으로 쑤셔 넣는다. 우리 인류에게 아주 익숙한 원시적 제의다. 아버지의 폭력은 마치 병자에게 행하는 치료 주술이자 사랑의 의무인 듯이 보인다. 이처럼 육식 문화의 이데올로기는 집단적이고 폭력적이고 거룩하다.

아버지가 탕수육을 강제로 집어넣자 영혜는 ‘으르렁거리며’ 탕수육을 뱉어낸다. 몸을 웅크리 채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교자상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흥건한 핏물과 쓰러진 영혜의 몸은 말한다. 난 싫어! 초식인간에겐 자해라는 방법 외엔 저항할 방법이 없는 걸까.

영혜는 일련의 꿈들을 꾼다. 소설 곳곳에 여섯 개의 끔찍한 꿈 이미지와 영혜의 독백이 삽화처럼 배치되어 있다. 어릴 적 기억과 신체적 경험의 이미지 조각들이 꿈의 자막에 상영되고 무기력한 독백이 배음처럼 들리는 방식으로 꿈 시리즈는 진행된다. 꿈의 서사는 꿈 꾼 이의 일기 기록처럼 보인다.

· ‘손목은 괜찮아. 아픈 건 가슴이야.’,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 날 살릴 수 없어. ~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꿈6)

몸이 말한다. 영혜의 몸이 말한다. 트라우마는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꿈속의 음식들로부터 도망치다 붙잡혀 있는 듯 하고, 꿈속의 입맛이 마구 침을 흘리게 한다. 무섭게 말하자면 꿈속의 칼이 자기 손목을 그어버렸다.

남편이 입원 중인 아내를 찾아갔을 때 영혜는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 근처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그녀는 환자복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손목의 붕대는 풀어버리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 입술은 루주가 마구 번진 듯 피에 젖어 있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있었다.” (65쪽)

단편 ‘채식주의자’의 이 엔딩은 극적인 반전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남긴다. 소설의 제목이 ‘채식주의자’이고, 영혜는 한사코 육식을 거부했는데 그녀가 동박새를 물어뜯었다면, 이 소설이 말하는 ‘육식 거부’와 ‘채식’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녀가 가슴을 드러내고 앉아있는 모습을 행위 예술로 읽는다면, 이빨에 물어뜯긴 ‘작은 동박새’를 영혜 자신으로 읽는다면 소설 이야기의 감도가 달라진다.

물어뜯는 이빨과 고기를 써는 칼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식당이나 정육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식탁과 가족이라는 핏줄 안에, 나의 말과 관계들 속에, 우리 문화와 조직들 안에, 국가와 역사 속 깊숙이까지 있다.

살육의 무기와 핏빛은 도처에서 일렁거린다. 내 몸과 내 속에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 멸종한다. 소설에 피맛이 난다.

황산 (씨알네트워크 대표, 인문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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