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선뜻 읽기 어려운 책일 수 있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용감하게 책장을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연결된 소설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았고 혼자서는 읽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이고 되새겨야 할 진실이 담긴 작품이지만 읽으면서 마음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럼 여럿이 함께 읽어보자’ 생각했다. 마침 5월이 다가오고 있었고 분명 나 같은 독자들이 더 있으리라 생각했다. <소년이 온다>를 혼자 읽기 두려운 사람들, 그들과 모여 이 책을 같이 읽자. 2016년 5월의 결심이었다.
이런 결심으로 진행했던 행사가 ‘<소년이 온다>릴레이 낭독회’다. 2016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들의 항쟁 기간인 열흘에 맞춰 매일 밤 소설을 낭독했다. 릴레이 진행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저녁 7시 30분, 한 명이라도 낭독회에 찾아오면 운영자인 나와 돌아가며 소설을 소리내 읽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미리 홍보는 했지만 사전 신청은 받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열흘간, 광주를 떠올리며 작은서점의 불빛을 찾아올 독자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참석자가 없으면 릴레이는 중단될 수 있음을 각오했었는데, 다행히도 참석자 총 33명, 하루 평균 6명이 서로에게 낭독의 배턴을 넘겨가며 열흘 동안 릴레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매일 밤, 참석자들의 이름을 <소년이 온다> 책의 면지(색지)에 날짜와 함께 기록했다. 이 녹색 종이에는 소설가 한강의 이름도 적혀 있다. 릴레이 낭독회의 마지막 날인 27일 밤, 한강 작가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미 낭독을 진행하고 있던 참석자 10명 중 몇몇은 작가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기도 했고 몇몇은 중간에 들어온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우리는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고 낭독을 계속했다. “책 가져오셨어요?”라고 작가에게 묻자 그는 조용히 “네” 하고 대답하고는 곧 다른 사람의 낭독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아홉 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는 끔찍한 대목에서 멈칫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목이 메여 읽기를 힘들어했고 누군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릴레이 낭독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때, 한강 작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가 2015년 12월 고요서사에 손님으로 방문했던 이후 이따금 안부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소년이 온다> 낭독회 소식을 반가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메시지로 전한 것이다. 그런데 낭독회 시작 이틀 전,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마음 한편으로는 작가의 낭독회 참석을 바라기도 했었지만, 마치 지금처럼 작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때이기도 하고 수상 이후 조용히 지내기를 바랄 그의 마음이 예상되어 답장이나 방문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었었다. 그런데 찾아와준 것이다.
낭독이 모두 끝나고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한강 작가가 말했다. 릴레이 낭독회에 매일 오고 싶었지만 자신이 방해가 될까 봐 오지 못했다고, 그렇지만 저녁 7시 30분이 되면 낭독회에 모였을 사람들을 계속 생각하고 떠올렸다고, 그러면서 많은 힘을 얻었다고…. 열흘의 밤, 우리는 <소년이 온다>를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넘게 읽었다. 동호, 정대, 은숙, 선주, 진수 등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을 말하고 그들의 말을 목소리로 뱉는 행위는 어떤 기도 같기도 했다. 소설과 읽는 이가 긴밀히 연결되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낭독회가 끝나고 며칠 뒤의 일도 잊을 수 없다. 고요한 서점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흰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다. 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서점 이곳저곳을 한참 날아다니는 나비가 신기하여 영상을 찍어 한강 작가에게 전송했다. 단지 나비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넋이었을까. 사실 알 수는 없지만, 작가와 나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서점에 다녀갔음을 느낀 그 순간을 문자 메시지로 나누며 다시금 광주와 소년과 열흘의 밤을 떠올렸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잊지 않는다면 ‘소년은 온다’는 믿음을 공유하면서.
<차경희 문학서점 고요서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