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펀드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자산운용사가 보유하고 있는 실물주식 규모도 늘었지만, 자산운용사가 증권사 등에 주식을 대여해 주면서 받는 수수료는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사가 운용사 펀드의 투자자로 참여하는 ‘갑’의 위치인 만큼, 운용사가 증권사에 주식을 저가로 대여해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증권사가 자산운용사에서 싼 값에 주식을 빌려 더 높은 수수료로 다른 투자자에게 빌려주는 ‘주식 전전대’로 손쉽게 돈을 벌고 있다는 지적이다.
계열 증권사와 운용사가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설정하며 이같은 ‘헐값 대여’ 계약을 체결해 ETF 투자자들의 수익이 줄어들 경우 ‘배임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16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자산운용사의 주식형 펀드 설정 규모가 2020년 77조6980억원에서 작년 말 117조7961억원으로 늘어난 반면, 운용사의 주식대여금은 45조2614억원에서 24조4268억원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 대여금은 운용사가 펀드 설정 등을 통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일정 수수료를 받고 증권사 등에 빌려주면서 발생하는 수익이다. ETF를 통해 보유한 주식을 대여해 받은 수수료는 ETF의 수익에 포함된다.
주식형 펀드 설정 규모가 커질수록 운용사가 보유하는 실물주식도 늘어난다. 하지만 설정 규모가 40조원 이상 늘어난 반면, 주식대여금은 20조원 넘게 줄어든 것은 결국 운용사가 대여 수수료를 낮춘 것으로 풀이된다.
기관 투자자 가운데 주식을 가장 많이 빌린 곳은 증권사였다. 지난해 증권사가 주식 차입에 지출한 비용은 504조8632억원으로 전체 체결규모의 85% 비중을 차지했다. 증권사는 개인과 기관 등에서 주식을 차입한 뒤 이를 다시 기관이나 외국인 등에게 빌려주며 수수료를 받는다.
하지만 자산운용사와 증권사의 주식 대여수수료율은 큰 차이를 보였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자산운용사별 주식 대여금 상위 10개 상장사의 연평균 수수료율은 0.065%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증권사의 상위 10개사 연평균 수수료율은 1.413%로 운용사와 21.7배 격차를 보였다.
운용사가 개인 투자자 등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설정한 펀드를 통해 확보한 주식을 증권사에게 ‘헐값’에 빌려주고, 증권사는 여기에 더 많은 수수료를 붙여 다시 기관이나 외국인 투자자에게 빌려주는 ‘주식 전전대’ 행위가 가능한 셈이다.
특히 개인 투자자의 자금이 집중된 ETF 상품에서도 이같은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식 대여금이 ETF의 순자산에 반영되는 점을 고려하면, 투자자의 수익을 줄여 증권사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 된다.
현재 금융당국이 증권 대여 수수료율 비교공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지만, 수수료율 공개 범위가 ‘리테일풀’에 그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개인이 증권사의 주식 대여 서비스를 통해 주식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수수료는 비교할 수 있지만, 운용사가 증권사에 얼마의 수수료를 받고 주식을 빌려주는 지는 확인할 수 없다.
비교공시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는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현재 마련되는 시스템은 개인이 주식을 대여하려고 할 때 어떤 증권사에 빌려주는 것이 가장 유리한지를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기관투자자의 주식 대여에 대한 내용은 논의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인 투자자가 대부분으로 구성된 펀드에서도 이같은 ‘깜깜이’ 대여가 발생해 투자자 수익이 줄어들었다면 배임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펀드 설정 당시부터 계열사간 투자 확약과 함께 저가 대여 계약을 체결하는지 여부를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통상 운용사의 신규 ETF 상장에 증권사가 핵심 투자자로 참여하는 만큼, 이같은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상복 서강대 로스쿨 교수는 “투자자의 수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운용사가 투자자 대신 증권사의 이익을 높여줬다면 충분히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며 “다만 투자업계 관행상 운용사보다는 증권사의 ‘갑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업계에서는 기관 투자자간의 주식대여 수수료 결정 문제는 계약 당사자간 결정할 수 있는 만큼, 배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사적 계약에 포함된 수수료율 내용을 시장에 모두 공개할 경우, 오히려 시장 교란 행위가 될 수 있다는 반박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종목과 대여 기간, 규모 등에 따라 수수료율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만약 이를 시장에 모두 공개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시장 혼란만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