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유엔은 ‘집단 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채택해 1951년 시행한다. 제노사이드(Genocide)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서다. 민족·인종을 뜻하는 제노스(genos)와 죽임을 의미하는 사이드(cide)의 합성어인 제노사이드는 폴란드계 유대인 변호사 라파엘 렘킨이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다. 1945년 11월 시작된 뉘른베르크 군사법정은 나치 전범을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했다.
국제사회가 제노사이드 범죄를 단죄할 때 한반도에선 공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자행됐다.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하에서 3만 명이 희생된 제주 4·3사건이 대표적이다.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4·3 생존자 트라우마를 다룬다. 주인공 강정심은 평생 4·3을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서다. 나이 들어 치매에 걸린 강정심은 식탁 밑에 숨어 딸에게 말한다. “구해줍서.”
도올 김용옥은 “제주는 슬프다. 슬픔은 그냥 슬픔이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중략). 제주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슬픈 제주를 슬프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슬픔에 동참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도올의 슬픔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동의어다.
현대에도 국가 폭력에 의한 인명 피해는 끊이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좌익 계열 전향자로 구성된 보도연맹 소속 민간인을 처형했다. 배신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때 희생자가 6만~20만 명에 달한다. 1980년 군사정권은 광주시민에게 총을 난사했다.
부산에선 ‘부랑인 정화’를 명목으로 또 다른 제노사이드가 자행됐다. 1970년대부터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3만8000여 명 중 657명이 굶주림과 폭행·질병으로 사망했다. 국가와 부산시는 ‘사회사업’으로 포장된 인권침해와 살인을 방조했다. 1960년대 영화숙·재생원은 길에서 놀던 멀쩡한 아이까지 끌고가 감금했다. 정부 보조금을 한 푼이라고 더 받기 위해서였다. 뒤늦게 납치 사실을 안 부모가 찾아가 아이를 찾는데도 내놓길 거부했다. 그곳의 삶은 지옥이었다. 매질을 못 견뎌 죽은 아이들은 ‘독수리산’으로 불리는 사하경찰서 뒤편 야산에 묻혔다.
지난 14일 영화숙·재생원 생존자들이 60년 만에 암매장 현장을 찾았다. 우리 사회가 희생자에게 사죄하는 길은 백골이라도 온전히 수습하는 것이다. 아직도 지하에서 “구해달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이노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