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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영 기자]
등교 준비로 바쁜 아침 누군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린다. 텀블러에 물을 담던 중 화들짝 놀라 물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누구일지 짐작이 갔다. 초인종이 있어도 매번 문을 두드려 인기척을 내는 이웃 어르신이다. 짜증이 날 만하다가도 문을 열고 마주한 할아버지의 사람 좋은 인상에 불만이 눈 녹듯 사그라진다. 시커먼 비닐봉지를 내게 내미는 그다.
“뭘 이렇게 많이 주세요?” “끝물이라 이제 없어. 먹던지, 버리던지.”
이건 마치 ‘오다 주웠다’ 하며 던져주는 츤데레의 행동이 아닌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열어본 비닐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가지가 담겨 있었다. 이걸 모두 어쩌나 싶었다. 몇몇 지인에게 가지가 필요하냐 물었다.
“우리 집엔 가지 먹는 사람 없어.” “며칠 전에 친정에서 받아온 가지 천지야. 왜? 너 좀 줄까?!”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충만한 의욕과 호기심을 밑거름 삼아 텃밭을 분양받고 갖은 작물을 재배한 적이 있다. 풋내기 농사꾼은 땅에 모종을 심고, 물만 주면, 식물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았다. 엄청난 수확을 한다면 누구누구에게 나눠줄지 김칫국을 마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초심자의 행운은 없었다. 만만하게 여긴 나를 벌주듯 그해 농사는 처참했다. 누군가의 텃밭에서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주렁주렁 열린다는 애호박과 가지도 몇 개 건진 것이 다였고, 욕심이 과해 다품종으로 심은 파프리카는 병충해를 입어 녹아버렸다. 케일은 애벌레가 모두 갉아 먹어 형체를 알 수 없었다.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무작정 덤벼든 풋내기 농사꾼의 말로였다.
몇 해에 걸쳐 실패를 거듭하고 농사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해마다 작은 마당 한쪽에 상추와 토마토 정도만 심어서 먹고 있다.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경험이었다.
그 뒤론 누군가 나눠준 농작물이 달리 보였다. 한낱 푸성귀에 불과했던 것들이 농사꾼의 땀방울이 만들어낸 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그것들을 썩혀 버리지 않고 귀하게 먹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이었다.
끝물이라는 단어의 쓸쓸함
검은 비닐봉지 속 모양이 제각각인 ‘끝물’ 가지를 한참 바라봤다. 문득 ‘끝물’이라는 단어를 오래도록 곱씹었다.
사실 제철이라는 게 따로 없을 만큼 원하는 식재료를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요즘이다. 할아버지 텃밭에서 난 마지막 가지를 보며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끝물 가지를 첫물(?)처럼 귀하고, 제대로 먹어주겠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야심 찬 다짐에도 불구하고 물컹한 식감을 싫어하는 두 아이는 가지라면 질색이다. 가지무침이나 나물, 볶음은 무조건 먹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긴 나도 그 나이엔 가지가 몸에 좋다, 맛있다는 엄마의 꾐에도 좀처럼 젓가락이 가지 않았으니, 아이들을 탓할 수도 없다. 어찌 먹을까 고심 끝에 알뜰살뜰 나만의 가지 요리로 결국 가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클리어(!)했다.
- 가지 말리기
수확 직후부터 갈수록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이 채소이니 우선 반은 덜어 말리기로 했다.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식품 건조기에 말렸다. 잘 마른 가지는 밀봉하여 냉동실에 보관한다. 비교적 오래 보관하며 가지밥을 하거나 나물로도 활용할 수 있다.
- 가지밥
적당한 크기로 썰어 양념에 볶은 가지를 불린 쌀과 함께 밥솥에 안쳤다. 고기를 넣는 가지밥 레시피도 있지만, 나는 가지로만 요리했다. 뜸을 들인 후 뚜껑을 여는 순간 구수한 향이 코를 즐겁게 한다.
몇 년 전, 가지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찾다 라따뚜이를 만나며 ‘유레카’를 외쳤다. 라따뚜이라고 하면 생쥐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떠오른다.
가지와 호박을 깍둑썰기하고 토마토소스와 볶아 접시에 담아낸다. 그 위에 가지, 호박, 그리고 토마토를 동그랗게 썰어 보기 좋게 두르고 올리브 오일을 뿌려 구우면 완성이다.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물에 갠 반죽에 먹기 좋게 썰어놓은 가지를 넣는다. 달군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주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가지튀김이 만들어진다. 뜨끈한 가지튀김을 초간장에 콕 찍어 먹으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다.
무기력이 극에 달해 자연스럽게 배달앱에 손이 가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해치운 가지 요리가 평범한 일상에 의외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웃이 건넨 정과 끝물 가지로 마음도 입도 풍성한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