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일까? 살아남는다는 뜻은 아닐까?
얼마 전 아이가 초등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엄마 둘과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무더운 여름 어떻게 보냈냐고 근황 체크를 하다가 교과서에 나오는 질풍노도란 비유가 아니라 팩트란 걸 확인했다. 한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가 찬 공을 맞고 앰뷸런스에 실려 가 방학 내내 평생 남을 수 있는 심각한 후유증의 공포와 보내야 했고, 한 아이는 친구의 장난으로 피해를 봤다가 사소한 언쟁에 우연히 상대 부모가 개입하면서 학폭 사태에 휘말리는 악몽 같은 경험을 했다. 내 아이 역시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다음에 소상히 밝히기로 한다. 과연 살아남았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질풍노도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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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두번째 친구의 이야기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드라마처럼 황당무계하고 섬뜩한 스토리이기도 했다. 요지는 우리는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를 전전긍긍하지만 가해자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내 아이의 피해자 서사가 아닌 가해자 서사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다는 게 꽤 흥미롭게 읽힌다. 최근 개봉한 영화 ‘보통의 가족’은 고등학생 아이가 어른 몰래 술을 먹고 노숙자와 시비가 붙었다가 폭력을 휘둘러 노숙자를 혼수상태에 놓이게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부모가 겪는 심리 변화를 다룬다. 볼 때마다 집에 불 좀 켜고 살았으면 싶은 티브이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아직 초반이라 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청소년 딸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는 경찰 아빠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맞고 집에 돌아오느니 차라리 때리고 와라’라는 말을 버젓이 듣고 자란 우리 세대는 사실 가해자 서사에 일정 부분 둔감할 수밖에 없다. 늘 피해자가 될까봐 걱정하고 피해자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다. 이렇게 교육받고 자라다 보니 귀하디 귀한 내 자식,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내 자식이 가해자가 될 리 없다는 생각을 손쉽게 한다. 피해를 당하는 것에 대한 주의만 줄 뿐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한 경고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죽음을 생각하는데 가해자는 ‘진심으로’ 장난이었다는 학교 폭력의 클리셰가 이렇게 탄생한다.
‘보통의 가족’과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두 아빠는 보는 이에게 감정의 이입을 끌어내면서도 불편하게 하는, 전에 없던 인물들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엄마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엄마는 자식을 무조건 믿어주는 존재로만 그리는 건 나처럼 못된 엄마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여튼, ‘보통의 가족’ 재규는 자식의 범죄를 알아차렸을 때 처음에는 자식을 감싸려고만 하는 아내를 비난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듯하지만 서서히 변해간다. 왜 아니겠나. 그 누가 범죄를 저지른 내 자식 손을 잡고 성큼 경찰서로 갈 수 있을까? 정의도 진실도 남을 심판할 때나 빛나지 가해자가 된 내 자식의 이야기가 되면 그만큼 직면하기 고통스러운 말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태수는 더 곤혹스러운 지경이다. 모든 정황이 자신의 딸을 범인으로 가리키는 데 부모는 자식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 부모 자식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이라는 불변의 진리 사이에서 진퇴양난이다. 그의 심증과 달리 딸이 범인이 아니라면 태수는 딸에게 ‘영원한 배신자’가 되어 부녀 관계는 회복불능의 파탄이 날 것이다. 재규와 태수가 처한 상황은 부모로서 ‘만약’이라는 말로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최악의 악몽과도 같다.
부모는 내 아이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서, 때로는 아이를 의심해야 하는 이율배반의 칼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칼 끝의 삶은 난이도 극상이고 사실 대부분의 부모가 한편으로 내려와 있다. 위에서 말한 아들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피해를 입었다가 영화 ‘대학살의 신’과 비교할 수 없는 대환장파티를 만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학폭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자신의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상대 부모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 아이를 피해자의 위치로 만들어 놓았고, 그 굳건한 믿음 앞에서 장시간 고문 당하던 담당 교사는 합리적 해결책을 포기한 채 “00 어머니가 참아주시면 안 되겠냐”는 간곡한 호소로 그저 목소리가 더 높지 않았던 부모를 주저 앉히는 식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사춘기 아이와 매일 지지고 볶으며 무심한 날들이 흘러가지만 문득 질풍노도의 한 가운데서 식은 땀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내 아이가 괴롭히는 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건 이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로 산다는 건 태수처럼 이 칼 끝의 삶을 매일 살 수는 없어도 때로 힘들게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이 엄청난 투쟁에서 스스로가 건 최면에 지지 않기를, 아이에 대한 믿음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 어려운 ‘오늘도 무사히’ 기도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