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계절의 변화를 식물처럼 온몸으로 드러내며 실현하는 존재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뿌리를 내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절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생명의 경이로운 사이클을 완주하는 식물은 우리에게 감탄의 대상인 동시에 어느 틈에 우리의 삶을 식물에 등치시키게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 민족의 자랑이 된 한강 작가를 세계에 처음 알리게 된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독립적이고 무해한 식물에 일치시키려 한 것도 이해가 된다.
긴 장마와 폭염 끝에 가을이 순식간에 실종될 거라는 염려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벼는 잘 여물어 추수의 기쁨을 선사했고, 과수들도 때맞추어 열매를 맺었다.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을 지내며 무사히 결실을 하고 씨를 만들어낸 식물들에 갈채를 보낸다. 앞으로도 계속 더워질 지구 안에서 오랜 기간 가혹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또 적응해온 식물들이 성공적인 생활사를 굳건히 이어가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씨를 맺는 종자식물들은 약 3억6천만년 전 고생대에 출현하여 지구의 육상 생태계를 떠받치는 존재가 되었다. 씨가 생기는 방식에 따라 겉씨식물과 속씨식물로 구분되는데, 소나무나 은행, 소철 종류 정도만 겉씨식물에 속하고, 대부분의 종자식물은 씨방이 씨를 둘러싸서 열매를 만드는 속씨식물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탁월한 능력 덕분에, 개화식물이라고도 불리는 속씨식물은 현재 약 30만종의 다양성을 자랑하며 식물 중 가장 성공한 부류란 찬사를 받는다.
우리는 어떤 노력이든 반드시 성과를 기대한다. 일이 이루어진 결과(結果)나 성과(成果)는, 모두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열매나 과일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대부분 먹을 수 있고 맛도 좋은 과육이지만, 식물의 입장에서는 과육보다 씨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과육은 씨를 보호하고 여러 곳으로 퍼뜨리기 위해 식물이 고안해낸 멋진 포장재에 불과하다. 씨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식물은 꽃을 피우고, 꽃의 생식작용을 통해 후손을 품은 씨가 생겨난다. 꽃에 있는 암술의 밑동에 자리 잡은 알세포가 수술에서 떨어져 나온 꽃가루 세포와 만나서 수정이 이루어지면, 수정란이 배아를 만들고, 그 배아를 키우기 위한 배젖과 보호막인 껍질을 발달시켜 씨가 만들어진다.
씨앗은 장차 성체로 성장할 배아를 품고 때를 기다리는 타임캡슐이다. 건조한 상태에서 어떤 기후조건도 견디어내며 발아할 환경을 기다릴 수 있다. 경남 함안에서 고려 시대의 연씨가 700년의 세월을 지나 발아하여 붉은 연꽃을 피우며 번식된 것이나, 성경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왕궁터에서 발굴된 2천년 전 야자씨가 발아하여 나무로 자란 것을 보면, 씨는 생명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이다.
그러하기에 지구의 위기를 대비하여 씨앗을 보존하려는 노력도 의미가 있다. 국제식량농업기구는 북극 노르웨이령 스발바르섬에 종자저장고를 만들어 100만가지가 넘는 작물의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 영구동토층의 지하에 마련된 저장고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에서 기탁한 씨앗들을 보관하고 있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이다. 경북 봉화군의 산속 지하에도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관리하는 저장고가 있다. 여기에는 약 20만점의 야생식물 종자를 보관하며 기후와 멸종의 위기를 버텨낼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씨앗은 적당한 환경을 만나면 당장에라도 발아하여 성장할 수 있고, 조건이 안 맞으면 수천년을 버티며 미래를 기다릴 수 있다. 다음 세대와 미래를 품고 있는 씨앗은 우리에게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얼마나 다양한 씨앗을 준비하고 있을까. 때를 만나기 전에는 그 열매가 무엇일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발아할 조건이 맞으면 어느 틈에 싹을 틔우고 자라서 눈부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그런 씨앗들. 종자 회사에서 영리적 목적으로 개발한 보급형 종자들은 대부분 당대의 성장에 그치고 후대로 이어지는 씨앗은 맺지 못한다. 자연의 법칙을 따라 제대로 결실한 열매의 씨앗들만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
미래를 위한 씨앗 중 하나는 기초과학이다. 국제연합은 작년을 기초과학의 해로 지정하고, 올해부터 2033년까지를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과학의 10년’으로 지정하였다. 이는 지구의 미래를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과학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선 올해 갑자기 국가의 연구개발 예산을 작년 대비 무려 2조8천억원이나 삭감하며 다양한 씨앗을 키우고 있던 기초과학과 기초연구의 현장들을 얼어붙게 만든 해프닝이 벌어졌다. 농부는 굶어 죽을지언정 종자를 지킨다는 속담이 소환되며, 종자를 먹어 치우는 어리석음에 비유된 이 예산 파동은 내년 예산을 다시 작년 수준으로 복원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된 듯 보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1년간의 냉해는 올해의 열매 수확에만 타격을 준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씨앗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불어닥친 의대 증원의 돌풍은 쓰나미가 쓸고 가듯 심각한 인력 이탈을 초래하며 과학기술 생태계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달 초에 발표된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들을 보면, 쓸모가 당장 보이지 않는, 열매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연구들을 시작하고 이끌어온 과학자들이 주를 이룬다. 마이크로알엔에이(microRNA)를 예쁜꼬마선충 벌레에서 발견해낼 때는 이 알엔에이가 인간에게서도 유전자의 발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장차 치료제로 개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기계학습을 통해 성장한 인공지능은 수십년의 겨울을 거치면서 최근에야 꽃이 핀 연구의 산물이다. 지구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단백질의 구조를 예측하고 디자인할 수 있는 인공지능 도구는 수많은 구조연구의 데이터들을 밑거름 삼아 열매를 맺었다.
씨앗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 눈에 보이는 과일만을 속성으로 재배하려는 사회에서는 이런 업적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노벨상을 바라기 이전에, 쭉정이가 아닌 튼실한 과학의 씨앗을 부지런히 많이 키워내야 한다. 바람이 제대로 불고 땅이 촉촉해지면, 우리의 토종 씨앗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한강 작가의 작품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최상급 열매를 맺을 것이다. 농부의 마음으로 그런 환경을 힘써서 꾸준히 만들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