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등장한 1990년대는 어른들이 노래를 등지고 앉은 때였다. 댄스와 립싱크가 공중파 방송의 기본이 되었을 때,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났다. 국악적인 리듬감, 재즈풍의 창법, 삶을 보듬는 노랫말을 갖추었다. 그렇게 그간 가요와 국악 모두가 꾼 꿈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1994년 10월 서울놀이마당. 허리가 굽은 노 명인이 황급히 달려와 춤을 추었다. 차가 막혀 한 시간이나 늦어 판이 끝나는 때였다. 의상을 갖출 틈도 없이 양복을 입은 채 팔을 들었다. 주전 악사가 떠나버려 당황스러운 상황, “태평소 가져왔어요?” 구경꾼이던 한 사람이 보결선수로 나섰다. 언제나 연주할 태세로 판을 돌았으니,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보경(1906~1997), 팔 하나만 들어도 춤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88살의 몸이라 놀지 못하고 서서 버텼다. 그 몸을 이내 들뜨게 만든 것이 장사익(1949년생)의 태평소였다. 노인은 남은 힘을 장딴지에 모았고, 점차 굽신하니 춤이 차올랐다. 마침내 선율을 지그시 밟기도 하고 훌쩍 넘기도 했다. 예기치 못한 판에 관객이 되돌아와 추임새를 넣었다. 눈 뗄 틈이 없어 카메라를 꺼내지 못하고 판이 끝났지만. 그 장면은 내 마음에 탁본으로 남았다.
한달 뒤, 장사익은 가수가 되었다. ‘예’(藝)라는 작은 소극장에 대극장만큼 손님을 모아놓고 노래를 불렀다. 언제나 국악판 뒤풀이 가수였기에 다들 “노래야 기가 막히지” 했다. 다음 해 1995년 10월, 음반 ‘하늘 가는 길’을 만들어서 시디(CD) 한 장씩 돌렸다. 누군가 공짜로 받으면서 “(하늘로) 뭐 벌써 가?” 했다. 또 다음 해 1996년 11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다들 자리를 채워주러 갔다가 기겁을 했다. 3천석이 꽉 차고 3백명이 돌아갔다. 사태를 알아챈 몇몇은 미리 예약해 3천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나머지는 3백명 가운데 하나로 기가 죽은 채 근처 주막을 향했다.
나는 3층은 아니라는 안도감으로 2층 끝 객석에 앉았다. 아득히 먼 무대에 그가 다듬잇살 잘 오른 두루마기로 나섰다. ‘아! 그이일런가’, 마른자리에선 풀풀 먼지 속에서, 진자리에선 푹푹 발이 빠지며 태평소를 불던 그이란 말인가. 찔레꽃부터 저 아래 1층부터 웅숭깊은 박수 소리가 올라왔다. “오늘 전 정말 호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봄비’와 ‘동백 아가씨’를 앞두고 말했다. “저 이 노래 30년 불렀어유.” 이내 목젖이 쏟아져 나올 고음으로 잊지 못할 꿈을 노래했다.
장사익은 초등학생 때 웅변으로 목을 닦았다. 중·고등학생 시절 소풍을 가면 가수가 따로 없었다. 취직 후, 가요학원에 월급을 꼬박 바치며 3년을 착실히 다졌다. 대망의 첫 곡 ‘대답이 없네’, 제목이 그래선지 섭외가 없었다. 다만 조국의 부름이 있었고, 덕분에 31사단 문선대(문화선전대)의 ‘봄비 아저씨’가 되었다. 전역 후, 통과해야 할 15개의 직업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마지막 관문은 평소 ‘임마’라고 부르던 매제를 ‘사장님’으로 모신 카센터였다. ‘딱 3년만’ 기약하고 태평소를 들고나와 ‘하늘 가는 길’로 저 높은 곳에 우뚝 서버린 것이다.
1997년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자유 콘서트. 어어부밴드, 노이즈가든, 봄여름가을겨울, 강산에가 앞섰고, 뒤는 조용필이었다. 그 화려한 밴드들 사이에 나가 ‘찔레꽃’을 터트렸다. 장사익을 연호하자 피아노 임동창을 소개하며 ‘국밥집에서’를 불렀다. 이제 “장사익을 어찌해서, 대중문화 어찌하자” 구호가 터졌다. 마지막 봄비에서 “나나 나나나” ‘떼창’을 이끌며 솟구쳐 “띠디릿 띠릿”을 넣었다. 그 즉흥 속에 ‘하늘 가는 길’의 “어허 야핫하”를 쇳소리 나게 섞었다. 이것이 곡(曲)으로 응고되지 않고 흥의 절정에서 출렁이는 장사익류의 즉흥이다. 양손이 찰지게 들러붙는 손뼉의 동력으로 폐활량의 아래에서 밀어 올리는 음의 근력, 이내 괄약근의 끝에 남은 기포까지 터뜨려 소리로 전환했다.
옛 명창들이 고음 대목을 어느 곡에든 섞어 부르는 ‘목 자랑’ 소리인데, 내게는 ‘대기하는 조용필 들으라는 소리’로 들렸다. 뒤를 이른 조용필, ‘단발머리’, ‘모나리자’ 등의 히트곡을 연창하며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었다. “혹시나 마지막이라 다 가시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말하자 오빠! 소리가 또다시 들불처럼 번졌다. 최루탄과 화염병 아래에서 민중가요를 불러도 조용필 노래 또한 시대의 필수 곡이었다. 불을 지른 장사익과 판을 막은 조용필, 그 밤은 잊지 못할 소리판이 되었다.
“나는 진짜 장사익이 되고 싶어.” 그저 가수일 뿐인데, 사람들의 평가와 기대가 부풀어갔다. 그가 등장한 1990년대는 어른들이 노래를 등지고 앉은 때였다. 댄스와 립싱크가 공중파 방송의 기본이 되었을 때,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났다. 국악적인 리듬감, 재즈풍의 창법, 삶을 보듬는 노랫말을 갖추었다. 그렇게 그간 가요와 국악 모두가 꾼 꿈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아니라 손사래 치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데뷔 초, 전북 전주에서 ‘장사익 소리판’을 벌였다. 한참을 듣고 있던 노인들이 “그럼 소리(판소리)는 언제 하는 것이여?” 했다. 소리의 본향 전주니, 소리라니 당연히 판소리로 알고 온 거였다. 그의 소리는 분명 전통 소리가 아니다. 철저히 유행가 기반의 창법으로 하는 노래다. 그러나 유행가 기반일 뿐이지 노래의 결이 달라 국악 쪽이라 보는 거다. 판소리가 붓으로 글씨를 쓴다면 장사익의 소리는 펜으로 붓글씨를 쓴다. 얇고 날카로운 선들을 수없이 그어 한 획의 두께를 만들어간다. 공연이란 한두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8폭 병풍을 쳐야 하는 일. 그러니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한 “바늘로 우물을 파는 일”을 하는 거다.
“노래방 어때?” 가수가 노래방을 앞장서니 어이없었다. 밥을 얻어먹은 터라 모두 딸려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봄날은 간다’를 찾아 불렀다. 자신의 차례가 올 때마다 그 노래였다. ‘아 또 꽂혀있구나.’ 이제 스스로를 방구석에 감금하여 수천번을 부를 것이었다.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 수없이 칼집을 내어 익혀서, 0.00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미 유행한 노래는 자기검열이 더 철저하다. 선율만 믿고 내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목을 단도리해 소리를 낸다. 목젖에 굳은살 박이게 스스로에 죽비를 가한다.
‘봄날은 간다’는 ‘다시래기’ 소리가 되었다. 다시래기는 풍악을 울려 상주를 위로하는 상갓집 놀이다. 그 화사한 노래에서 어찌 그 어두운 그늘을 찾았을까. 2절의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강물에 빠져 꽃을 들고 노래하는 ‘오필리아의 죽음’(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을 읊는 것도 같다. 망자를 그냥 보내드리기 죄송해서, 병원 영안실에서 판을 만들어 소리를 한다. 한때는 ‘하늘 가는 길’이었고, 뒤에는 ‘귀천’이나 ‘아버지’도 불렀다. 지금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첫 소절로 살아있는 자들을 숙연케 한다.
예전에는 국밥집에서 밥을 편히 먹었다. 애써 주인에게 가수라고 소개해도 말이 안 먹혔다. 요즘은 밥술을 뜰 새 없이 인사를 받으니 그의 앞자리는 비워놓게 된다. 얼굴에 주름살을 토종닭처럼 놓아 기르니 눈에 더 띈다. 그래서 식사가 더뎌지는 국밥집에서 자신은 팔 하나만 들어도 춤이 되는 명무처럼 노래하고 싶다고 한다. 무려 30년이나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말이다. 그때마다 그의 노래 ‘국밥집에서’에 나오는 노인이 탁자를 탁탁 쳤고, 하보경이 뛰어들어 팔을 들었다.
30년 전 11월, 생각하니 그때부터 최고의 반주자를 잃어가고 있었다. 태평소는 부는 데 힘이 드는 악기라 노래와 겸하기가 버겁다. 소리판이 늘면서 악기를 놓고 있었는데, 하보경 이후 장금도, 문장원, 조갑녀 등 숨어 있던 분들이 나타난 것이다. 정식 무대에서는 삼현육각에 춤을 추었고, 뒤풀이나 놀이판에서는 그의 태평소에 추었다. 쓰다 달다 말이 없는 분들의 짧은 미소, 나도 그도 그리운 판일 것이다. 조갑녀 타계 후에는 아예 악기를 놓았다. 이제 곰삭은 분도 사라지고, 숨도 더 차오르기 때문이다.
아쉬운 이야기는 오는 10월23일 세종문화회관의 장사익 소리판 ‘꽃을 준다 나에게’를 보고 이어가야겠다.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