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레스토랑에서 두 쌍의 부부가 식사를 한다. 잘나가는 대형 로펌 변호사와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 존경받는 소아과 의사와 일과 가정을 모두 놓치지 않는 현모양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가족이지만 이들의 메인 요리는 따로 있다. 식탁 위에 아이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CCTV 영상을 올려놓고 끔찍한 가족회의가 열린다. 아이들을 자수시킬 것인가, 아무도 모르게 사건을 덮을 것인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들을 재료로 맛깔스러운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을 연출한 멜로 장인 허진호 감독이 이번엔 우아한 심리 스릴러로 돌아왔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두 쌍의 상류층 부부가 자식들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이야기. 개봉 첫날인 16일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다. 한 명이라도 자수를 선택하면 두 가족 모두 파멸하게 되는 구조로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심리전이 벌어진다.
원작 소설의 탄탄한 서사를 한국 사회에 맞춰 각색했다. 전 세계 누적 100만부가 팔린 네덜란드 소설 ‘더 디너’는 벌써 네 번째 영화로 만들어졌을 만큼 극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원작에선 전채 요리부터 메인, 디저트까지 코스에 맞춰 서서히 가족의 추악한 비밀이 드러나는 과정을 그렸다면, 영화는 세 번의 식사로 변주했다. 입양, 인종 차별과 같은 유럽 사회의 이슈를 소년범, 학교 폭력, 과도한 교육열 등 한국 사회의 첨예한 문제로 바꿔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세 번의 식사 장면에서 맞붙는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 대결도 볼거리다. 돈 되는 일은 물불 가리지 않는 형 재완(설경구)과 원칙을 중시하고 양심적인 동생 재규(장동건), 일과 육아는 물론 시어머니 간병까지 병행하는 수퍼우먼 연경(김희애), 새엄마로 이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지수(수현)까지. 아이들을 경찰서로 데려갈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사건을 덮을지를 놓고 네 사람의 신념이 쉴 새 없이 충돌한다.
허진호 감독은 카메라 세 대로 같은 장면을 수차례 반복해 찍으면서 배우들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 ‘창궐’ 이후 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장동건은 식사 장면에 대해 “기가 빨렸다”면서 “네 명의 입장이 모두 다르고, 네 명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서 세심한 조율이 필요했다”고 했다.
겉만 보고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인물들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얄팍한 캐릭터가 넘쳐나는 시대에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보여준다. 배우들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을 징그럽게 연기해낸다. 교양 있는 척하지만 위선적인 인물들이 뼈 있는 말로 서로를 긁으면서 나오는 블랙 코미디도 일품이다.
얼핏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서늘하지만,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여전하다. 아이들에게 유리하게 상황이 돌아갈 때, 정의로운 척하던 부모의 얼굴에 띤 엷은 미소를 놓치지 않는다. 피해자 가족을 찾아간 재완(설경구)이 죄책감을 돈으로 막아보려다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인 듯한 얼굴로 돌아서는 장면도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충격적인 반전으로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호평을 받았다. 계속해서 선택의 기로에 던져지는 인물들은 스멀스멀 본성을 드러낸다. 카메라는 멀리서 이들을 내려다보며 관객이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고민하게 한다.
허진호 감독은 원작의 제목을 바꾼 이유에 대해 “두 가족의 반응이 보통의 행동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통의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또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제목이라 좋았다”고 했다. 곳곳에 숨겨뒀던 뇌관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의 가족, 보통의 인간일까.
☞원작 소설 ‘더 디너’
영화 ‘보통의 가족’의 원작이자 네덜란드 소설가 헤르만 코흐의 대표작. 부부 동반 저녁 식사에서 아이들이 연루된 범죄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로 가족의 갈등과 첨예한 사회문제를 정교하게 엮어냈다. 세계에서 누적 100만부가 팔렸고, 네덜란드·이탈리아·미국에 이어 한국에서 네 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