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조종하는 푸틴… 옛 소련 약소국들이 불안하다

옛 소련에 속했던 국가, 친서방 정권과 친러 세력의 고질적 갈등, 점증하는 러시아의 위협…. 2022년 2월 러시아 침공 이후 항전(抗戰) 중인 우크라이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유럽의 두 작은 나라 몰도바와 조지아가 곧 선거를 치른다. 두 나라 선거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서방 세력과 친러 세력의 대결 구도가 형성된 상태다. 결과에 따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포함해 국제 정세가 격변에 휩싸일 수 있어 서방과 러시아가 물밑 지원을 펼치며 ‘총성 없는 대리전’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 정책 연구소 채텀하우스는 “두 나라가 친서방 또는 친러 중 어느 길로 갈지 선거를 통해 결정이 날 예정”이라고 전망했다.

◇몰도바: EU 가입 불편한 러시아의 정보전

지난 15일 몰도바 수도 키시너우에선 미하이 포프소이 부총리 겸 외교장관이 노르웨이·덴마크·라트비아 등 북유럽과 발트해 인근 자유 진영 8국의 외교장관과 회동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이른바 ‘하이브리드 공격’에 공동 대처한다는 양해각서에 서명하기 위해 만났다. ‘하이브리드 공격’이란 친러 매체·소셜미디어와 친러 정치인들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발산되고 있는 현 정권과 서방에 대한 비난 메시지 살포를 뜻한다.

앞서 10일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이 몰도바를 방문해 향후 3년간 18억유로(약 2조6744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은 20일 몰도바의 선거를 앞두고 이뤄졌다. 몰도바는 이날 대통령 선거와 EU 가입 찬반 국민투표를 동시에 치른다. 강력한 친서방 노선을 구사해온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인 마이아 산두(52) 대통령의 재선 여부와 EU 가입으로 대표되는 친서방 정책 지속 여부가 이날 판가름난다.

구(舊)소련 연방에 속했던 몰도바는 2022년 EU 가입 후보국 지위를 획득했다. 옛 소련 연방국의 EU 가입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극도로 거부감을 보이는 사안이다. EU 정식 가입의 주요 절차 중 하나인 국민투표를 앞둔 가운데 몰도바에선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뉴스 형태로 EU 가입을 반대하는 반정부·친러시아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러자 EU 고위급 인사들이 잇따라 몰도바를 찾아 현 정권과의 연대를 과시한 것이다.

EU는 러시아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고 판단하고 있다. 온라인에 퍼지는 출처 모를 정보들은 ‘집권 여당이 국토를 군(軍) 시설로 바꿀 준비를 한다’ ‘유럽 농부들이 EU 가입 후보국에 대한 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영국과 손잡고 트란스니스트리아(몰도바 내 친러 장악 지역)에 대한 도발을 준비한다’처럼 반서방 감정을 선동하고 공포를 자극하는 내용이 많다.

원래 이번 선거는 산두 대통령이 친러·중립 성향 야권 후보들에게 맞서 재선에 성공하고 EU 가입안도 무난히 가결되리라고 점쳐져 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막판 정보전 공세가 심상치 않아 예상외로 고전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EU 위원장까지 막바지 총력 지원에 나서는 양상이다. 미국도 가세했다. 연방 상원 외교위원회 소속 민주당 벤 카딘 의원은 지난 11일 메타(페이스북)와 알파벳(구글·유튜브)에 공개서한을 보내 몰도바 선거에 대한 러시아의 ‘해로운 개입’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했다. 페이스북은 이후 일부 친러 성향 게시물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면적은 남한의 3분의 1, 인구는 서울의 4분의 1 정도인 작은 나라 몰도바는 유럽의 최빈·약소국으로 꼽힌다. 이 나라가 친러 집권 세력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서방이 총력 지원전을 펼치는 것은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몰도바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와 EU·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국 루마니아 사이에 있다. 동부 13%를 차지하는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친러 세력이 자치하는 지역으로, 몰도바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련의 부활을 꿈꾸며 ‘친러 지역(돈바스) 보호’를 명분 삼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푸틴이 같은 구실로 몰도바를 다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돼 왔다.

2020년 취임한 산두 대통령은 강력한 친서방 노선을 고수하며 러시아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난민을 대거 받아들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무력 충돌과 서방 사이 완충지대 역할을 해온 셈이다. 만약 선거에서 산두 대통령이 뜻밖에 고전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패배를 겪을 경우 우크라이나가 우군(友軍)을 잃고 지정학적으로 불리해지면서 러시아에 유리한 구도가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조지아: 탄핵 기로에 선 친서방 대통령

몰도바 선거 엿새 뒤인 26일 치르는 조지아 총선도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역시 옛 소련 연방이었던 조지아는 총리가 실권을 쥔 내각제 국가다. 친러시아 노선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는 집권당 ‘조지아의 꿈’이 친서방 노선을 명확히 하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압도적 의석수(3분의 2, 100석)를 확보하느냐가 쟁점이다. 현재 ‘조지아의 꿈’은 73석을 확보 중이며, 우호 세력을 합치면 87석이다.

조지아는 러시아와 악연이 깊다. 2008년 자국을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에 굴복했고, 그 결과 영토 내 친러 지역이었던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국가 내 반러 감정이 악화하면서 ‘그루지야’라는 국가 발음을 ‘조지아’로 2008년 바꾸며 반러 노선을 확실히 했다.

이런 영향으로 조지아는 EU와 나토 가입을 신청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가스 수입량 증가 등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는 여전하고, 친서방 정책을 선호하는 지식인·도시민·청년층과 러시아에 친근감을 가진 농촌·보수·장년층 간 여론 분열도 심화됐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지역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 전쟁에 휘말려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친러 정치 세력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국민 가운데는 여전히 친러 노선을 확실히 해 재침공 위험을 예방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아 친러 성향인 ‘조지아의 꿈’이 다수당이 될 수 있었다.

최근엔 러시아 체제를 본뜬 입법으로 이어졌다. 지난 7월 집권당 주도로 자국 주재 외국 언론과 외국 시민 단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외국인 등록법’이 통과된 데 이어 지난달에는 동성 커플의 입양을 제한하고 성전환을 금지하는 ‘가족 가치 및 미성년자 등록법’이 가결됐다. 친서방 성향의 살로메 주라비슈빌리(72) 대통령이 두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집권당은 이를 무력화했다. 이번 총선에서 원내 1당 수성이 유력한 ‘조지아의 꿈’이 100석 이상 거머쥘 경우 눈엣가시 역할을 했던 대통령까지 탄핵하고 친러로 더욱 기울 가능성이 크다.

선거를 앞두고 러시아가 개입하고 있다는 정황도 나오고 있다. 조지아의 시민운동가 니노 돌리제는 지난 8월 EU가 운영하는 가짜 뉴스 판별 사이트 ‘EU 대(對) 거짓 정보’ 인터뷰에서 “지난해 이후 유포된 (반서방 메시지를 담은) 가짜 뉴스들은 러시아발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서방은 이를 우려하며 제재로 맞서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반정부 시위를 강경하게 탄압했다는 이유로 조지아 고위 관료 등 60명을 무더기로 제재했다. EU도 지난 7월 조지아의 EU 가입 신청 절차를 전격 중단하고 국방 지원 예산 3000만유로(약 445억원)를 보류하는 등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17~1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에서 조지아 집권당의 친러시아 정책에 대해 우려·경고하는 공동성명이 준비되고 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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