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엔 김범석 기자]
인생 3대 불행. 소년 급제, 중년 상처, 노년 무전이다. 너무 일찍 성공하거나, 마흔 전후 배우자를 비자발적으로 잃거나, 은퇴 후 무일푼이 되면 삶이 고단해진다는 선인들의 훈계다. 꼰대들의 넋두리로 치부해도 되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구전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인생 빅데이터 결과는 아닐는지 턱을 괴게 된다.
▲X파일 탈곡기 돌려도 미담만 나와
이중 소년 급제, 소년 등과를 연예계에 비유하면 딱 아이돌, 아역 출신 스타들이다. 어릴 때부터 전 국민의 관심과 귀여움을 독차지한 이른바 국민 여동생들. 요즘 ‘동치미’에 패널로 나오는 이 방면 원조 임예진을 비롯해 문근영, 박보영, 김유정 등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어사화를 단 인물들이다. 그런데 딱히 불행해 보이는 이는 없다.
굳이 초년에 가장 많은 운을 끌어쓴 사람을 꼽으라면 문근영이 되겠다. 깜찍한 외모와 뭘 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언행, 여기에 각종 선행이 뒤늦게 알려지는 통큰 기부 천사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물의를 일으킨 제일기획 연예인 X파일에서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옴’이라며 미담이 기록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엄마로 나온 염정아는 문근영에 대해 ‘촬영장에서 새벽마다 할머니와 고사리를 캐는 아이’라며 ‘어쩜 그렇게 대견해’를 연발했다. 문근영이 ‘삼촌’이라고 칭한 매니저 김종도 대표는 “나무엑터스라는 회사명도 근영이가 지어준 거다. 성실함과 배려가 몸에 밴 근영이와 그의 부모를 보면서 한때 성선설을 굳게 믿었다”고 회고한다.
▲국민 여동생 이미지가 오히려 발목
문근영의 연기 인생도 그렇게 고속도로만 달릴 줄 알았다. 하지만 제2, 제3의 여동생들이 나오고, 성인 연기로 환승하는데 애먹으며 출연작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연극 ‘클로저’에서 가슴 파인 노출 의상을 입고 흡연하는 스트리퍼로 출연, 파격 변신도 시도했지만 호불호가 갈렸다. 무대 위 엄기준과의 키스 신을 보고 ‘원조교제 같아서 눈을 감았다’는 관람평도 있었다. 귀여운 국민 여동생 이미지가 오히려 족쇄가 돼 그의 앞길을 방해하기 시작한 거다.
필모를 보면 ‘사도’(2015), ‘유리정원’(2017) 이후 출연작이 없다. 혜경궁 홍씨로 나온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624만 명을 모으며 히트했지만, 2만 명이 든 저예산 ‘유리정원’은 상업적으로 참패였다. 드라마도 tvN ‘유령을 잡아라’(2019)가 마지막. 아무리 선택받는 직업이라지만 내키는 책이 안 들어오는 상황은 초조함, 낙담을 넘어 존재가치와 자기효능감을 떨어뜨리게 돼있다.
여전히 문근영을 쓰려는 감독, 제작자는 많았다. 돈을 대는 투자사, 채널이 이에 가세하지 않았을 뿐. ‘동안이라 역할과 안 맞는다’, ‘남주가 원하는 여배우가 따로 있다’, ‘빌런이 대세인데 싱크로율이 낮다’ 등이 문근영 앞에 놓인 바리케이드였다. 할 만큼 했다는 피크아웃과 정체기인 캐즘 사이에서 문근영이 택한 건 연출 도전.
▲혹독한 번아웃 통해 성장통 겪어
그는 2022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단편 ‘심연’, ‘현재진행형’, ‘꿈에 와줘’를 공개하며 감독이 돼 나타났다. 주연을 겸한 ‘심연’은 푸른 물속에 갇힌 여자가 빛을 찾아 나아가는 이야기. 대사 없이 오로지 눈빛과 표정만으로 숨 쉬고 싶은 절박함을 표현하는데 삶의 출구를 갈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당시 문근영은 번아웃 경험을 고백하며 ‘인생은 끝없는 반복이고 그조차 내가 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지친 그를 치유한 건 여행과 글쓰기. MZ들은 문근영을 오는 25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지옥2’로 처음 만나게 된다. 1편을 성공시킨 연상호 감독이 광신도 화살촉 리더 역으로 문근영을 픽한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부가 공개됐는데 문근영의 작두 탄 연기가 나온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주인공만 하다가 조연이 된다는 건 팬들과 본인에게 다소 겸연쩍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주어진 서브플롯을 감쪽같이 해내면 주연이 될 기회는 반드시 온다.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배역은 없는 법. 소년 급제했어도 주위 질시를 이겨내고 자신을 수련하면 얼마든지 좋은 배우로 롱런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문근영이 보여줬으면 싶다.
뉴스엔 김범석 bskim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