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란’에서 종려(박정민)는 조선 최고 무신 집안 아들이다. 무예 실력은 변변찮다. 무과 과거에서 번번이 낙방한다. 연습 상대였던 노비 천영(강동원)은 면천할 기회로 본다. 종려의 아버지 극조(홍서준) 앞에 엎드려 간청한다.
“소복(小僕·나이 어린 사내종)을 도련님 대신 과장(科場·과거 보는 장소)에 넣어 주십시오.” “이놈이 실성했나.” “면천(免賤)해주시겠다 약조만 주십시오. 반드시 장원급제하여 어사화를 바치겠습니다.”
면천은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평민이 됨을 뜻한다. 천영은 호언장담대로 대리 시험에서 장원한다. 극조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조정도 다르지 않다. 왜군 장수를 생포한 천영에게 면천은커녕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 천영은 7년 만에 재회한 종려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기생집 개새끼도 도둑 잡으면 쉰밥이나마 그릇 가득 먹이거늘, 전공을 세우면 상 주겠노라 약조한 왕은! 우리를 모함하고 주살하였다. 마치 네 아비처럼!”
법적 차원에서 면천은 축복.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실직이었다. 김종성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은 저서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면천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명예퇴직 같은 것이었다. 물론 부유층 양반가의 얼자(孼子·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생긴 아들)가 면천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들의 경우에는 어차피 생계가 보장돼 있으므로, 면천은 곧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계가 보장되지 않은 일반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면천되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면천되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재앙이었다.”
‘전,란’처럼 대다수 사극은 노비의 노력이나 노비주의 시혜(施惠)가 면천으로 이어지는 듯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주로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됐다. 비상사태, 재정 부족, 자연재해, 기근 등에 직면할 때마다 관련 문제가 부상했다. 국가는 돈을 받고 면천을 시행했다. 형태는 납속(納粟), 즉 곡식 헌납이었다.
이 영화 배경인 선조 재위(1567~1608)에 빈번하게 발생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명나라군은 보급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조정은 노비들에게 손을 벌렸다. 곡식을 헌납하면 면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에는 공노비로 한정했다. 그러나 이들의 납속만으로 해결되지 않아 사노비로 범위를 넓혔다.
면천에 노비 주인들은 대체로 반발했다. 노골적으로 납속을 방해했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왜구 문제로 고민하던 조정은 군공을 세운 노비에게 면천을 제공하겠다고 보증했다. 이에 적잖은 노비 주인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사적 형벌을 가했다. 노비가 주인을 배반했기에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조정은 대응책을 고민했다. 사헌부는 노비 주인들을 처벌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처럼 노비 주인들의 피해를 고려한 적도 있으나 대체로는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면천을 시행했다. 그만큼 다급한 경우가 많았다.
면천을 약속한 조정이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도 제법 있다. 노비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 나 몰라라 한 셈이다. 인조반정 직후가 대표적 예다. 광해군 때 면천된 공노비가 너무 많다면서 이들의 면천을 취소했다. 대신 일정 기간 이들의 의무를 면제해주라고 지시했다.
때때로 면천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주로 정변을 계기로 단행됐다. 승자 쪽이 자신들에게 가담한 노비들을 면천하곤 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자신의 즉위에 일조한 노비들에게 평민 자격을 부여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도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는 노비들을 면천한다고 선포했다. 실제로 노비 1200여 명은 반란을 진압하고 면천됐다. 조선의 노비제도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