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10대와 20대 초반을 지역 도시에서 보냈다. 지근거리에 친척이 모여 살았는데, 부모님이 일찍이 제 갈 길을 가기로 결정한 뒤에도 어른들은 여전히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엄마에게 이런저런 충고의 말을 건넸던 모양이다. 개중에는 ‘다 큰 딸’에 대한 듣기 싫은 지적도 포함돼 있었는지,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나를 크게 나무라신 일도 있다. 20대 특유의 치기로 때때마다 되바라지게 받아치긴 했지만, 삶에 별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어쩐지 궂은 말은 곧잘 보태는 친척과 지인들의 ‘간섭 사회’에 차츰 싫증이 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서울에서의 삶을 꿈꾼 건 그래서였다.
이달 초 개봉한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 속 주인공들 역시 대도시의 익명성 안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청춘들이다. 지방에서 상경해 자취하는 대학생 재희(김고은)는 자유롭게 클럽 생활과 연애를 즐기고, 그의 성소수자 친구 흥수(노상현)는 눈치를 봐야 했던 고향에서와 달리 마음에 드는 동성의 연인을 만나 사랑한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아 그만큼 삶의 방식도 다채로운 이곳 대도시 서울은 이들의 자유와 취향을 최대한도로 보장하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재희와 흥수는 자신이 어느 집 자식인지, 누구를 만나 몇 시에 집에 들어가는지 따위를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는 무명의 이웃들 사이에서 취향껏 재주껏 즐겁게 살아 나간다.
그러나 이곳 대도시에 오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간섭도 관여도 없는 공간에서는 그에 따르는 위험까지도 필연적으로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 안녕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건 타인과의 유의미한 연결점이 사라진다는 걸 뜻하고, 그건 언제든 쉽게 고립된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한 없는 유흥을 누리던 재희는 자취방에서 자기 속옷을 훔쳐 가는 변태를 마주치고도 별다른 대응법을 찾지 못하고,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 안에서 비로소 마음에 드는 동성 상대를 만난 흥수는 ‘자기만큼이나 자유롭게 지향을 표현하는’ 혐오 세력에게 노출돼 수모를 당한다.
연고 없는 대도시의 삶을 택한 이들에게도, 결국 자기 삶을 함께 지탱해 나갈 울타리 같은 동맹을 확보하는 일은 필연적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이미 20대를 다 지나보낸 나이든 관객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는 이유라면, 위급할 땐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서글플 땐 진실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게 이 대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영원한 숙제라는 걸 보여주는 성숙한 시선 덕분일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대학 생활이 주를 이루는 20대 초반 이야기뿐만 아니라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중후반을 거쳐 결혼을 고민하는 30대 초반까지의 에피소드를 차례로 배치했는데,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만남과 이별의 시행착오를 겪어낸 이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 끝에 재희는 품이 넓은 남자와의 결혼을 택하고, 흥수는 더는 자기 생각과 지향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작가로서의 삶을 걷기로 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길을 택했든 그에 대해 섣불리 충고하거나 평가하기보다는, 그저 믿고 지지하기로 한다. 때문에 그들의 우정은 여전히 각별할 수 있다. 이들이 내뿜는 찐득한 연대감이 어쩐지 좀 간지러운 듯 느껴지는 관객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수많은 이유를 품고 살던 곳을 떠나 이곳 대도시 서울에 정착한 관객들 각각의 지난 기억을 무리 없이 소환한다. 지나친 간섭과 선 넘는 충고에 질려 이곳까지 흘러온 우리에게도, 도움과 위로를 건네며 서로를 소중히 여겨줄 수 있는 든든한 관계만큼은 분명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