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 삶을 비유하자면, 우리는 모두 숲속을 걷는 보행자다. 각자의 여정이 다르기에, ‘숲길’이라는 단어만으로는 그 다양한 여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게다가 같은 길을 걷더라도, 처음 발을 디딜 때, 중간을 지날 때, 그리고 끝에 다다를 때 마주하는 풍경과 감정은 모두 다르다. 숲의 향기와 소리도 시시각각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다양함은 ‘산책’이라는 하나의 경험 아래 조화롭게 흐른다.
이러한 숲에 착안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있다. 바로 미슐랭 1스타 ‘솔밤’이다. 이곳을 이끌고 있는 엄태준 셰프는 자신이 추억을 함께한 곳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그의 소중했던 기억을 쌓았던 곳을 고객들에게도 소개해 주기 위함이다. 솔밤을 방문하는 모든 고객의 느낌이 같을 순 없음을 알고 있지만, 각자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남길 그는 바란다.
솔밤은 경북 안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숲이다. 저녁 7시에 버스가 끊길 만큼 외진 곳에 있다. 그러나 엄 셰프는 이곳만큼 편안한 곳이 없다고 했다. 인적이 드물기에 자신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밤이면 솔밤의 매력이 더욱 커진다고 했다. 달빛이 비치는 소나무가 가득한 곳. 밤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을 알고 있기에 레스토랑 역시 저녁만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솔밤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고객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한다. 따라서 식사 코스도 마치 오솔길을 걷는 것처럼 비슷하게 구현해뒀다. 레스토랑 솔밤의 특이한 점은 식사 공간이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길의 첫 부분이 등장한다. 숲의 첫 공기를 들이마시듯 이곳에선 디너 코스의 첫 메뉴가 주어진다. 달콤한 머랭과 어우러지는 고소한 닭간 무스. 짭짤한 캐비어와 단새우. 허브향이 가득한 딜 등을 통해 솔밤은 오늘 있을 산책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이후 고객은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산책로’에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솔밤이 정성껏 준비한 다채로운 별미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여름에는 계절의 청량함을 살린 메뉴들이 다양하게 준비됐었다. 참다랑어, 북방 조개를 상큼한 토마토, 레몬을 곁들여 만든 ‘물회’와 담백한 관자와 향긋한 딜로 만든 ‘비빔밥’ 등이 그 대표적인 요리들이다.
가을이 주는 고유한 색채를 담아, 솔밤은 이번 가을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닮은 메뉴를 선보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와 대하, 고소한 잣, 흙 내음이 가득한 더덕이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관자, 전복, 메추리 역시 각각의 매력으로 솔밤에서의 산책을 더욱 풍성하게 채운다.
이 중 한우로 만든 한국식 스테이크는 솔밤 코스의 절정을 알린다. 먼저 잘 구워진 붉은 소고기를 한 입에 베어 물면, 불 맛과 육즙이 어우러지며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이어 솔잎 붓으로 멸치 액젓 장을 살짝 발라 곁들이면, 깊은 가을밤처럼 풍부한 감칠맛이 입안에 퍼진다. 알싸한 통마늘 장아찌와 살짝 들어간 청양고추는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고기의 특유한 맛도 잡아준다. 이어 쌀누룩과 오일로 졸여낸 더덕도 별미다. 식감은 가을 땅의 질은 토양과도 닮아있는데, 함께 올라간 콩테(Comte) 치즈의 짭짤한 맛이 더덕의 향긋함과 만나 깊은 맛을 낸다.
무르익은 가을을 표현하기 위해 밤을 활용한 디저트도 준비돼 있다. 밤으로 만든 몽블랑과 버번(Bourbon) 위스키 아이스크림은 식사의 잔존감을 말끔히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옥수수로 만들어진 버번위스키는 특유의 달콤함을 지니고 있으며, 고소한 밤과 초콜릿이 어우러져 오크 향과 함께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솔밤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에게는 여운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아침에 즐길 차와 커피, 파운드케이크를 선물로 준비한다. 아침 햇살 속에서 즐기는 케이크 한 조각과 음료에 담긴 세심한 배려는, 마치 산책의 끝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여운처럼 깊게 다가온다.
―간단한 약력 소개 부탁드린다.
“솔밤을 이끌고 있는 엄태준이다. 요리를 처음 접한 것은 21살 중식당으로 일하면서다. 이후 서양 요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일레븐 매디슨 파크 등 세계 유명 식당에서 근무한 후에 솔밤을 열었다.”
―솔밤은 어떤 곳인가.
“솔밤은 한국 음식 뿌리의 근원을 두고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는 곳이다. 나 스스로는 네오클래식 코리안 레스토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특정 장르의 뿌리를 요리 내에 잘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후 창의적인 시도를 가미해도 그 근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4년 차에 접어들면서 솔밤 만의 정체성도 생기는 것 같다.”
―신고전주의를 표방하는 곳이라고도 말했는데, 좀 더 듣고 싶다.
“신고전주의, 또는 온고지신을 통해 솔밤의 성격을 설명하곤 한다. 옛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의미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쉽게 설명하면 전통 한식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거기에 얽매이진 않는다는 의미다.”
―솔밤은 저녁만 운영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다. 점심과 저녁은 같은 음식을 내놓더라도 시간의 차이 때문에 고객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수 있다. 영화로 설명하자면 내가 선보이고 싶은 장르는 장편 영화다. 보통 파인 다이닝의 저녁 코스는 2시간 정도로 이뤄지는데, 내가 원하는 감정을 전달하기엔 조금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밤의 디너 코스는 3~4시간 정도다.”
―레스토랑 이름을 솔밤으로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솔밤은 경북 안동의 한 지역 이름이다. 이곳엔 내 개인적인 추억들이 많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이곳을 찾아서 사색하곤 했다. 들릴 때마다 감정은 달랐지만 솔밤은 언제나 내게 위안이 됐다. 이런 감정을 고객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레스토랑 이름도 솔밤으로 짓게 됐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파인 다이닝은 팀원들의 화합이 매우 중요하다. 절대 혼자선 못한다. 팀원들 각자의 위치, 담당 하나하나 모두 유기적으로 흘러가야 한다. 우리 팸플릿을 보면 내 이름이 팀원들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이유다. 모두가 중요한데 총괄 셰프한테만 관심이 집중되는 게 아쉬웠다.”
―개업 1년 만에 미슐랭 스타를 받은 소감이 궁금하다.
“미슐랭 별을 받는 것을 인생의 지표로 삼아 왔었다. 미슐랭 별을 받은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지만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하나의 징표와도 같았다. 앞으로도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미슐랭 별만을 좇는 셰프가 되고 싶진 않다.”
―이번 가을 시즌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이번 가을 역시 제철에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식재료로 준비했다. 대게, 더덕, 한우, 캐비아 등 여러 진귀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솔밤과 13번째 시즌을 함께 하고 있는 고동연 헤드 소믈리에가 메뉴에 맞게 추천해 주는 술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이번엔 페어링이 7가지나 나오는데, ‘돔페리뇽 2013 빈티지’, ‘감사’라는 한국 전통주 등이 준비돼 있다. 400여 개가 넘는 와인을 맛보며 날카롭게 감을 다듬은 만큼, 기대해도 좋다.”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가 있다면?
“대파를 가장 좋아한다. 맛이 다채롭기 때문이다. 대파는 그냥 먹었을 땐 맵지만 구웠을 땐 달다. 끓여 냈을 땐 맛의 깊이감이 있다. 또 흰 부분과 초록 부분의 맛도 다르다. 대파같이 깊이감 있는 요리를 발전시키는 게 하나의 목표다.”
―어떤 셰프로 기억되고 싶은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셰프가 되고 싶다. 스스로의 기준을 높이고 싶다. 또 솔밤을 찾아주는 분들께 감사하다. 솔밤 직원들이 쏟은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시면 바랄 것이 없다. 파인 다이닝 업장을 운영하다 보면 영화의 서사와도 비슷하게 코스가 흘러간다. 솔밤은 인간 냄새가 나는 ‘드라마’와 비슷하고 싶다. 한 접시를 내 오기까지 20명이 넘는 솔밤의 주조연들이 함께 한다. 솔밤의 코스를 우리들이 그려낸 드라마라 생각하고 즐겨주시면 뒤에 따라오는 여운과 감동으로 보답하고 싶다.”
☞엄태준 솔밤 오너 셰프는
▲미국 CIA 요리학교 졸업 ▲임프레션 前 부총괄 셰프 ▲일레븐 매디슨 파크 前 CDP ▲솔밤 現 오너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