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란’에서 무신 종려(박정민)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노비들이 들고일어난다. 종려의 식솔을 죽이고 가옥에 불을 지른다. 막동이 아버지가 봉기를 주도한다. 노비들에게 낫과 호미 수십 자루를 나눠주고 선동한다. “언제까지 개돼지 취급받을 거야?”
실제로 임진왜란 시기에 노비 저항은 급증했다. 대규모 전란과 함께 사회 시스템이 이완되자 상당수가 도망갔다. 거주지를 이탈하거나 멀리 떨어진 주인과의 연락을 단절했다.
후자는 주로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주인집에 거주하지 않고 독립된 가정을 가지면서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노비)였다. 전란으로 토지가 피폐해져 주인의 착취가 가중되면 도망을 선택하기 쉬웠다.
양대 전란을 계기로 급증한 노비 도망은 18세기가 되면서 거의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주변에서 도망 노비를 보는 일이 흔했다. 노비가 아니더라도 먹고 살길이 많았던 셈이다.
김종성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은 저서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도시에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거나, 임금을 받고 농사일을 할 기회가 많아졌을 수 있다. 그런 대안이 없었다면, 아무리 현실이 힘들더라도 쉽사리 현실로부터 도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잡히지 않은 건 오늘날 불법체류자 증가와 궤가 같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불법체류자 상태인 외국인 수는 41만183명이다. 약 39만 명인 세종특별자치시 인구수보다 많다. 단속을 강화하고 있으나 3년째 40만 명을 상회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큰 문제로 느끼지 않아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공기관에 알리려 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 도망 노비들도 그런 존재였다. 도시나 농촌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거의 신고당하지 않았다.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없으면 산업생산이 불가능했다.
이들을 색출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예컨대 고려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란 기구를 두고 도망 노비 추쇄(推刷) 작업을 벌였다. 조선도 건국 3년 뒤인 1395년에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세우고 같은 작업을 수행했다. 이런 기구에서 추적한 노비는 공노비였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노비 도망은 보편화됐다. 조정이 감당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이에 정조는 1778년 노비 추쇄를 중단했다. 이때부터 노비제도 해체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었던 셈이다.
도망보다 태업으로 저항한 노비들도 적잖게 있었다. 일을 게을리하거나 걸렀다. 공물 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8세기 중후반 노비 주인들의 신공(身貢·노비가 신역 대신 삼베, 무명, 모시, 쌀, 돈 따위로 납부하던 세) 수입은 크게 격감했다. 같은 시기에 도망 노비 추쇄가 금지된 점을 고려하면 노비에 대한 국가와 주인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했다고 할 수 있다.
‘전,란’의 노비들처럼 주인을 살해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빈번하게 발생한 건 15세기 후반인 성종 대부터다. 이는 법률제도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주인을 폭행한 노비를 참형에 처했다. 때리기만 해도 참형을 받으니, 노비로선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 수 있었다.
살주(殺主) 현상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다가 순조 때 가서야 급감했다. 김 위원은 “순조의 아버지인 정조 때부터 노비에 대한 통제가 크게 이완되다 보니, 노비와 주인이 정면충돌할 기회가 다소 줄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노비들의 저항이 줄어든 건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확산해 노비 관리비용 증대를 초래했다. 주인들이 도망간 노비를 찾고 노비들의 저항을 방어하는 일을 두고 고심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국가 입장에서도 비용 증대였다. 노비와 주인의 갈등을 처리하는 데 많은 공권력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용 증가는 노비제도 해체로 이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주인들이 노비 대신 몇 달 혹은 1년 정도만 부릴 수 있는 임금노동자를 찾기 시작한 까닭이다. 당시 임금노동자 상당수는 도망 노비였다. 법적으로 취약한 이들을 고용하는 게 주인으로선 더 유리했다. 조정이 추노를 포기한 데는 이런 대안이 있었고, 이는 노비제도가 해체되는 동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