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준수도권

요즘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 중에 ‘기내(畿內)‘라는 게 있다. 여기서 ‘기’는 황제나 왕이 머무는 황궁 혹은 왕궁에서 가까운 지역을 가리킨다. 본디 중국에서 황도 주변 5백리 땅을 일컫는 말로, 요즘 표현으로 ‘수도권’인 셈이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왕도인 한성을 둘러싼 경기도가 기내였다. 이들 지역의 땅은 대개 왕실이나 고위 관리들의 소유로 이들 지배층이 기내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수산물, 목재 따위를 독차지했다. 왕도를 중심으로 경제와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에 기내지방은 어느 왕조에서나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혔다.

요즘 ‘준수도권’이라는 희한한 낱말이 나타났다. 충청도가 수도권과 다름없는 준수도권이라는 것이다. 이 신조어의 등장 배경이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영호남이 충청권을 준수도권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런 저런 몫을 자신들끼리 독점하려는 것이다.

영호남 시도지사와 국회의원들이 남부권 성장 거점을 마련하겠다며 수도권 집적이 충청권까지 확대돼 영호남의 소외감이 커지고 있다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제2중앙경찰학교를 충남 아산·예산이 아닌 전북 남원에 둬야 한다며 합동 유치전에 나섰다. 영호남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충청권 왕따를 시작한 것이다.

작금 영남과 호남의 지역갈등 및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국난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판에 영호남이 충청권과 편 가르기에 나선 것이다. 정치인들이 갈등과 분열, 대결의 나라 만들기에 골몰하는 모양새다. 충청권에 세종시를 건설하고 있지만 법적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이고 인구도 39만 명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기내’와 수도권은 고려-조선에서 현재까지 여전히 서울과 경기도, 인천이다. 이런 상황이 너무 오래 계속돼 전체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 50.7%, GDP의 52.5%가 몰린 세계 최악의 일극 집중국가가 됐다.

수도권 집중 탓에 지방은 경제와 교육, 문화 등 모든 게 무너지고 소멸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끼리 편을 가르는 것은 어리석고 한심한 짓이다. 중앙정부를 압박하여 지지부진한 360여개 수도권 공공기관 이전을 실천토록 하는 등 함께 지방 살리기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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