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탐미야담(耽美夜譚) : 밤드리 노니다가

한밤중, 달이 떠오른 서울 하늘 아래, 처용은 길을 나섰다. 달빛에 비친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마주한 것은 자신의 아내와 누군가의 부정이었다. 분노를 품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춤을 추며 이성을 지키려 한 처용, 그 의연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다. 또한,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절벽 위 꽃을 꺾어 바친 헌화가의 노인, 용왕에게 바쳐진 수로부인을 되찾기 위해 백성들이 부른 구지가의 노랫소리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이렇듯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의 신간 ‘탐미야담(耽美夜譚) : 밤드리 노니다가’는 오랜 시간 우리 민족과 함께 한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탐구와 밤의 이야기가 주는 신비로움을 한데 엮어낸다. 라종일 교수는 고전 설화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과 그 안에 담긴 미학을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탐미라는 말처럼, 그가 이끄는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닌, 아름다움과 감성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밤의 이야기들은 한층 더 깊은 의미와 함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독자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정으로 이끈다.

이 책은 40여 년 전인 1983년, 라종일 교수가 고전 설화들을 재해석해 외국계 잡지사에 영어로 기고한 원고를 국문학자 김철 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다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라 교수는 헌화가, 처용가, 지귀 설화 등 고대 설화 속에 숨겨진 인간 본성과 그 안에 담긴 미학을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탐미야담이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단순한 옛날이야기나 설화가 아닌, 아름다움과 감성에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향연이다. 수로부인을 위해 꽃을 꺾은 노인의 용기, 배신을 승화시킨 처용의 관용, 지귀의 사랑과 불타는 열정 등, 이야기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탐미하며 깊은 철학적 사유를 끌어낸다.

라종일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학자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이어 주영대사와 주일대사를 역임하며 대한민국의 외교를 이끌었으며,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도 국가 안보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내외 학문과 외교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밤드리 노니다가를 통해 새롭게 드러난다. 외교, 정치, 국가 안보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던 그가, 40년 전 정치학자로서의 젊은 시절, 고전 설화와 향가를 새롭게 써 내려간 것은 그가 지닌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라 교수의 밤드리 노니다가는 단순한 고전 설화의 재해석이 아니다. 헌화가, 처용가, 구지가 같은 고전 시가를 그의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다시 써 내려가며, 이야기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를 통해 고전의 의미를 현대 독자들에게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헌화가에서는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꽃을 바친 노인의 용기를 강조하고, 처용가에서는 배신을 깨달음으로 승화한 처용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

라 교수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데 탁월하다. 이는 단순한 전개를 넘어, 독자들이 각 장면에서 깨달음과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고전 이야기를 교과서에 박제된 채로 두지 않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서 경험하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밤드리 노니다가는 고전 설화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을 다시금 일깨운다. 구지가에서 용왕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백성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민중 저항의 상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처용가에서 처용이 보여준 관용은 단순한 도덕적 승리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 고통과 사랑에 대한 깊은 사유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단순히 그 설화에 내용을 알리는 데만 집중하고 있지 않다. 외려 그 설화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조상들의 지혜, 가치 등을 해석해 우리의 길라잡이 역할도 도맡고 있다.

라 교수는 이 같은 고전 시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수천 년 된 이야기일지라도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가르침과 미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이러한 점은 책 속에 담긴 설화들이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인의 삶과 맞닿아 있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밤드리 노니다가는 고전과 현대, 전통과 재해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라 교수의 감성과 지적인 탐방은 오랜 시간 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김철 교수의 번역과 함께, 이 책은 고전 문학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도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고전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새롭게 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매력적인 안내서가 될 것이다. 밤드리 노니다가는 독자들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그 순간’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시간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라종일 지음ㅣ김철 옮김ㅣ 헤르츠나인ㅣ144쪽ㅣ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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