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882년 ‘키이우 루스’라는 초기 국가 형태로 슬라브 민족의 구심점이었다. 하지만 키이우 루스가 1240년 몽골 제국에 의해 무너진 뒤 우크라이나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까지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 채 러시아에 종속됐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진 혼란을 틈 타 1917~1921년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UPR)‘이라는 이름의 나라 경험을 짧게 했을 뿐이다.
그때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에 의존했다가 이들의 패배와 배신으로 소련에 흡수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소련 내 15개 공화국 중 하나가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2년 2월 24일 ‘특별군사작전’ 개시 전날, 전쟁 이유를 밝히면서 우크라이나를 ‘인공적 산물’이라고 폄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만들어준 것을 소련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실수’라고 했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은혜를 잊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통해 비수를 꽂으려는 것을 단죄한다는 게 푸틴의 전쟁 논리 중 하나였다.
요체는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 자주국방 대신 외세 의존을 지속해왔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국가(國歌)에도 나오는 조상 격인 카자크 집단은 러시아로부터 독립과 자치를 염원했지만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 강국인 폴란드·오스만튀르크·스웨덴·독일 등에 의탁해 러시아에 맞섰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외세의 힘을 빌려 싸워온 악습의 연장선이다. 서방의 막대한 군비 지원으로 전쟁은 만 3년을 향해 가고 있지만 결말을 알 수 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형국이다.
특히 북한군 파병으로 최고조에 이른 북·러 밀월이 우리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다. 러시아의 긴급 요청에 북한이 자발적으로 호응한 점에서 우려가 더 크다. 보은 차원에서 러시아의 군사기술과 통치자금 제공 등을 예측할 만하다. 푸틴은 지난 6월 북·러 조약 체결 직후 북한에 파병 요청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거짓이 됐다. 지난해 9월 극동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에서도 북한군 파병이 거론됐지만 크렘린은 발뺌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보내지 않은 한국에 감사를 표하는 등 혼선을 주며 실속을 챙겼다. 그래서 러시아의 위장된 행보로 어떤 더 놀랄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북한과 핵을 포함한 무기 체계를 공유하거나 종전 후 북한 땅에 군대를 주둔시킬 가능성도 제기한다. 푸틴은 북한을 매개로 우리를 계속 흔들기 위해 김정은 체제 안정을 내세워 주북러군을 두려고 할지 모른다. 북·러 관계는 늘 상식을 앞서가니 무작정 ‘설마’라고 할 건 아니다.
반면 파병 군인들이 총알받이가 돼서 북한 민심이 이반할 것이며, 러시아의 군사기술 제공에 한계가 있다는 등 낙관론도 많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 없는 개인적 바람일 뿐이다. 푸틴이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참전용사와 그 유족을 끔찍이 챙기는 것만 봐도 북한 파병부대를 위한 상당한 성의 표시를 예상할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생사를 건 도박을 하면서 특단의 선물도 보장받지 않고 파병을 결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계를 상대로 “무기 좀 달라"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북한 파병을 기회로 이젠 병력까지 내달라고 할 수 있다. 북한군 파병 소식을 전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 귀에는 무기 지원 호소로 들린다. 하지만 자립 못 하는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제공하는 것은 북한군 노고를 치하할 푸틴에게 대북 기술 제공의 구실만 높여준다.
세계는 푸틴과 젤렌스키가 파놓은 진흙탕에 꼼짝없이 갇혔다. 출구는 전쟁이 끝나는 것밖에 없어 보인다. 이제는 국제사회가 종전과 휴전의 목소리도 높여야 한다.
[김병호 논설위원]